어르신들이 그렇다고 한다. 젊었던 시절의 신문이나 TV프로그램을 볼 때면 고스란히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그래서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미국 출판 전문지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지난해 최고의 책 톱 10으로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를 꼽았다는 것과 무관하게,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도서 출판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온 데다 1872년 창간 이래 서평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아온 주간지라는 수식어를 굳이 배치하지 않더라도, 19년 만에 리마스터판이 나왔다는 것에 반색한 까닭이다. 20년 젊어진 느낌을 주는 책을 만났으니 말이다.
출판사(창비)가 책의 얼굴을 바꿔 다시 내놓은 리마스터판이다. 초판은 2002년 3월 출간됐었다. 하성란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이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초이스 콩그레추레이션' 하며 마냥 쏘는 시퍼런 축포가 아니다. 출판업계가 마케팅만으로 통하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보통의 자신감이 아니면 내놓지 못할 리마스터판이다. 19년 전과 달라진 독자들의 트렌드라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지 않을 자신 있어? 덤벼봐'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이 글을 읽느냐 마느냐의 팔 할(80%)은 첫 줄, 그리고 첫 단락에서 매듭져 결판난다. 하성란 작가는 매번의 결판에서 이긴다. 첫 단락에서 다음 단락, 그리고 또 다음 단락 그리고는 어느덧 끝까지 읽도록 끌고 간다. 셰에라자드의 재림이다.
무조건적인 찬사를 늘어놓진 못하겠다. 한기욱 평론가도 해설에서 비슷한 의견을 내놨지만 '결론이 이게 뭐지' 하는 것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버린 게 11편이다. 온전한 작가의 내공이다.
소문난 잔치에 확실히 먹을 게 많다. 19년 전 나왔던 소설집이니 한 세대가 바뀔 만큼 시간도 갔겠다, 신간이라 우겨도 실랑이해볼 구석이 있다. 표제작인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못지않게 흥미로운, 작가에게 한국일보문학상을 안겨준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포함해 11편이 소설집에 들어차 있는데 이 작품들을 지금 읽어도 왜 재미있는 거냐고 따져보고 싶기 때문이다.
최신작이 2002년 현대문학 1월호에 실린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다. 독자들의 반응도 웹사이트 이곳저곳에 켜켜이 쌓여 호응도를 따지기 수월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당대의 화제작은 단연코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를 다룬 '별 모양의 얼룩'이었을 테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며 층간소음의 고통을 명징하게 새긴 현대인들에겐 '고요한 밤'이 물개박수 대상에 오른다.

순차적 스릴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도 줄 서 있다. 문학동네 2000년 겨울호에 실린 '저 푸른 초원 위에', 동서문학 2001년 겨울호에 실린 '밤의 밀렵'은 요즘의 스릴러물에 견줘도 '좋아요'를 더 받으면 받았지 하등 뒤질 게 없다.
개별적 스산함을 객쩍은 소회로 풀어낸, 힐링과 필링 사이에 있는, 다수에 의해 간택돼 베스트셀러라 불리지만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책들로 독서를 주저하고 있다면 19년의 시간차를 잊게 해줄 이 소설집을 집어 들어야 한다.
'이즘(-ism)', '니즘(-nism)'에서 한 발 떨어져 묵직하게 사건과 사건을 잇고 상징물을 세우고, 복선을 깔고, 반전까지 입혀 써낸 글은 스스로 빛을 낸다는 걸 한 수 가르쳐주는 소설집이다. 396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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