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비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라고 쓰인 비문이 있다. 이 비문의 주인공은 1886년 조선 근대 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 겸 선교사로 내한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H. Hulbert)다.
헐버트는 한국에서 영어와 지리 등을 가르쳤고 한글을 연구하여 처음으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 역할을 했고 을사늑약 후 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한국 밀사와 함께 활동했다.
헐버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알렌, 아펜젤러 등과 함께 국내 역사‧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휘보'에 글을 실었는데 1896년 2월에 기고한 '한국 성악음악'에는 그가 얼마나 한국음악을 사랑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 글 서두에 '서양사람들이 한국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한국인의 기질이나 훈련이 아닌 인위적인 서양인의 귀로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빠귀가 박자를 맞추지 않고 종달새가 세로줄이나 점음표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이 한국음악은 박자에 구속되지 않는다. 운율에 속박받지 않는 시와 같다고 했다.
지금은 제3세계 음악이 인정받으나 한때 서구음악 중심주의가 세계를 지배했다. 19세기 후반에 출발한 '종족음악학'은 그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음악적 행위를 자민족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다루었다. 초기에는 '비교음악학'이란 용어를 썼는데 서구음악을 우위에 두고 비(非)서구음악을 비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종족' 또는 '인종'과 '음악학'을 결합한 '종족음악학(Ethnomusicology)'으로 변경했다. 이것의 핵심은 종래 서양음악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자국 음악의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헐버트는 서양인이지만 철저한 한국인의 관점에서 우리 음악을 대했다. 가령 명창이 시조의 음표 하나를 연주하는데 서양 성악가가 3절로 된 노래를 다 부르고 앵콜송까지 부를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는 한국인이 정서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고상한 것에 기꺼이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최초로 우리의 성악곡인 시조, 아리랑, 뱃노래를 서양 오선보에 채보했다. 그 중 아리랑은 한국인의 식탁에서 밥이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고 했다. 이 곡은 한국인의 사랑 노래로 서정시, 교훈소설, 서사시가 함축된 바이런이요, 워즈워스라고 칭송했다. 서양음악에서는 상상력을 해친다고 가사에 지명을 사용하지 않지만 한국음악에서 지명을 넣는 것은 아주 매력적이면서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비문에서처럼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인이면서 한국민족을 사랑했고 한국 정신문화를 존중했다. 그는 종족음악학에서 말하는 서구인의 시각이 아닌 한국인의 시각에서 우리의 음악을 바라보았다. 한국음악을 감상할 때 한국적인 귀로 듣고도 한국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쿵저러쿵 한국음악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그만큼 뼛속 깊이 한국음악을 사랑했다.
유대안 대구합창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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