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다 됐지만, 저항의 불길은 계속 타오르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2021년 2월22일에 총파업을 통해 쿠데타 규탄 시위를 벌인다는 의미에서 2를 5개 붙인 '22222 시위'가 벌어졌다. 최대 도시 양곤 등 미얀마 전역에서 벌어진 이날 시위에 공무원과 은행직원, 철도근로자, 의료인, 자영업자 등 쿠데타 이후 가장 많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수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 메우면서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으며 SNS에 '진짜 강 옆에, 사람들이 강을 이뤘다'며 거대한 군중 규모가 묘사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군사정권은 쿠데타 직후 SNS 차단 등 반대 움직임을 억누르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시위가 잇따르자 군경이 무차별 사격에 나서 지금까지 4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유혈 참극이 빚어지고 있다. 이에 유엔과 미국,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나서 즉각적인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등 압박에 나섰다. 미국은 행동에 나서 쿠데타 연루자들에 대한 자산 동결과 거래 금지 등 제재를 가하고 있다. 국내외의 거센 저항과 압박에 직면한 미얀마 군사정권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은 상황이다.
미얀마 군부는 작년 11월 총선에서 심각한 부정이 발생했음에도 문민정부가 이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지난 1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전체 선출 의석의 83.2%를 석권하며 압승했으나 군부는 선거 직후부터 유권자 명부가 860만 명가량 실제와 차이가 있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수치 고문의 NLD는 지난 2015년 총선에서도 압승, 1962년 네 윈의 쿠데타 이후 53년 동안 이어진 군부 지배를 끝냈다. 그러나 이번 쿠데타로 수치 고문은 다시 군부에 의해 억류되었고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수렁 속에 빠져 버렸다.
미얀마 군부는 이처럼 압도적 지지를 받는 문민정부를 입증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쿠데타가 무지막지하게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미얀마 군부의 정치적 자신감과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미얀마는 태국, 캄보디아 등 군부의 입김이 센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도 군부의 힘이 가장 큰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네 윈과 그의 군인 후계자들이 오랜 기간 미얀마를 지배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쿠데타를 저지른 군부의 행보와 속내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미얀마 군부는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할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 운영의 등뼈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절대적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미얀마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 학생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무장독립군 '30인의 동지'가 결성됐고 이들이 독립운동뿐 아니라 새 공화국 수립도 주도했다. 독립영웅으로 아웅산 수치 고문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1915~1947년), 미얀마 초대 총리를 지낸 우 누(1907~1995년),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통치한 네 윈(1910~2002년) 등 '30인의 동지' 소속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미얀마를 건국했고 통치했다. 이때문에 미얀마 군부는 곧 국가 자체라 해도 될 정도였고 군부의 자부심과 자만심도 흘러 넘쳤다.
미얀마 군부는 또 소수민족 분쟁을 진압하고 치안 유지에 나서면서 비대화하고 영향력이 커졌다. 미얀마는 68%를 차지하는 버마인 외에 샨인, 카렌인, 라카인인 등 135개 민족과 종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로 독립 이후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인과 기독교도인 카친인들이 종교 분쟁을 벌였고 접경 지역의 소수 민족은 독립을 주장하거나 중앙정부에 저항했다. 이로 인해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학살과 인권유린, 소년병, 인신매매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이와 별도로 무슬림인 로힝야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양산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해 군대가 대처해 건국 초기 시절 한동안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았다. 군대는 자연스레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어 엘리트 집단으로 자리잡게 됐다.
네 윈은 1962년에 같은 '30인의 동지' 출신인 우 누 정권을 쿠데타로 뒤엎고 20여 년간 실권자로, 막후 실세로 미얀마를 지배했다. 1983년 10월 초에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했다가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 현지인 등 21명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숨진 사건도 전 대통령이 당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영향력을 행사하던 네 윈의 통치술을 전수받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네 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식 사회주의'를 국정 이념으로 내세웠다. 외국인을 추방하고 해외 관광객을 받지 않는 배타적인 쇄국정책, 세속적 욕망 자제, 개인 소유 불인정, 소수민족 억압 등이 기묘하게 얽힌 정책이었다. 이런 국정 기조는 경제를 파탄나게 해 네 윈은 미얀마를 고립된 빈곤국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네 윈과 그의 군인 후계자들이 집권하던 시기에 크고작은 시위가 있었지만 군사정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1988년 8월8일에 수 만명의 학생들이 주도한 '8888 민주화 시위'가 있었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고서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최근에 벌어진 '22222 시위'는 '8888 시위'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8888 시위'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초석이 되었고 이 무렵 영국에서 귀국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오랜 가택연금 생활에 들어가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중심 인물로 떠올라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국민의 희망이 되었다.
미얀마는 지난한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쳐 수치가 이끄는 NDL이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군부 지배를 끝냈다. 그러나 군사 정권 당시 제정한 헌법에 따라 군부는 선거와 무관하게 상·하원 의석의 25%를 할당받는 것은 물론 내무·국방·국경경비 등 3개 안보·치안 부처의 수장도 맡게 돼있어 여전히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수치 고문은 미얀마에서 독특하고도 강력한 위치에 있는 군부와 공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에 군부가 벌인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학살과 박해를 방관하거나 침묵함으로써 비판을 받아야 했다. 2019년 12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증인으로 출석해 로힝야 학살에 대해 변명함으로써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명예에 스스로 먹칠을 하기도 했다.
수치의 NDL은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83%를 득표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군부와의 권력 공생을 깨고 완전한 민간정부를 이룰 수 있을만큼 확고한 권력 기반을 다졌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의 총칼에 눌리고 말았다. 이번 쿠데타로 미얀마 군사정권은 미국과 유럽 등으로부터 비판과 제재를 받게 되지만 중국과 밀착된 관계를 지니고 있어 국제적 역학관계도 얽혀 있다. 미얀마 민중들은 쿠데타 반대 시위에 나서면서 군사정권을 겨냥함은 물론 중국 정부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데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쿠데타의 주역으로 아웅산 수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흘라잉은 로힝야족 학살의 책임자로 국제사회에서 '인종 청소'의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외신들은 작은 키에 안경을 쓴 흘라잉이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다며 그에게서 인간적 면모를 찾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남에게 군림하는 독선적 성격으로 2016년에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방문 때 자신이 있는 군사령부로 찾아오라고 말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야욕이 가득하고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며 고집불통이라는 악평도 따른다. 군부 내에서조차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라며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고 그와 자녀들은 초호화 생활을 하면서 각종 이권을 주물러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꼽히기도 한다. 군이 지분을 갖고 있는 2개 대기업의 수익을 챙기고 고급 리조트를 소유하면서 연예산업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한 전직 외교관은 "그는 수치 고문을 격하게 불신하고 싫어했으며 처음부터 수치 고문이 이끄는 문민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그가 물러서거나 타협하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도전을 받을 때 힘을 과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라고 전했다.
쿠데타의 강을 건넌 미얀마 군부는 과거와는 다른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예전처럼 쉽게 정국을 장악하고 국민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는지 모르지만, 국내외적인 저항과 압박이 결코 만만치 않다. 고립되고 폐쇄적이었던 미얀마도 이제는 개방되고 정보가 흐르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미얀마 군부가 인터넷과 SNS를 아무리 차단한다 하더라도 미얀마 국민은 서로 연대하면서 저항에 나서고 있다. 압도적 지지를 받는 정부를 전복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흘라잉이 물러설 줄 모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혈 충돌의 피해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에서 되풀이되는 군사 쿠데타의 악습의 고리를 미얀마 국민이 나서서 끊을 수 있다. 그들이 지원을 바라는 많은 한국인들이 마음을 모아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