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다시,사투리] 사투리는 마음의 안식과 평온를 주는 집과 같아

②예술 속 사투리-4.사투리詩와 추억

손부엉 作-달
손부엉 作-달

2.예술속 사투리

4) 사투리詩와 추억

윤일현 시인
윤일현 시인

사투리는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힘겹던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면서도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되는 집단 무의식의 거처다. 카를 구스타프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무의식의 심층이고, 신화적 체험의 토대이자 생활의 뿌리인 동시에 원천이다. 사투리는 이 모든 관념이 거주하는 집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마을의 정자나무, 공동 우물,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 뒷산, 강변 백사장과 긴 방죽, 여름날의 원두막, 초등학교 운동장 등과 함께 진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친구가 떠 오른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잡고 나면 어린 시절 친구가 보고 싶고 열심히 살아온 내력을 내보이고 싶어 한다. 이런 이유로 시골에서는 주로 삼십 대 중반에 초등학교 동기회가 결성된다.

◆사투리는 생활의 뿌리

내가 갔던 날은 20명 정도가 모였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고 악수를 하면서 긴 앉은뱅이 탁자에 앉았다. 여자 동기도 대여섯 명 있었다. 소란스러운 대화가 한창 오가고 있는데 맞은편 여자 동기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야 일마야, 니 내 모리겠나? 너가부지하고 우라부지 노름하는데 니하고 내하고 가치 마이 차자 댕깃자나, 그거 다 이자뿟나? 나뿐 놈아"(야 이 녀석아, 너 나 모르겠나? 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노름하는 곳에 너하고 나하고 같이 많이 찾으러 다녔잖아, 그 일을 다 잊어버렸나? 나쁜 놈아)"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에 갑자기 지난날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매년 농한기 동지섣달이면 동네 어른들은 주막집에 죽치고 앉아 이삼일씩 밤을 새우며 '섯다'판을 벌였다. 나는 토끼 가죽 귀마개에 누나가 짜 준 털장갑을 끼고 이웃집 점태와 아버지를 부르러 가곤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시를 썼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나루터 근처 주막집으로/노름하는 아버지를 부르러 가는 것이/나의 변함없는 연례행사였다//'아부지예 어무이가 집에 오시라 캅디더'하면/그날 저녁은 난리가 났다//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호지 너머/주모의 몸 움직임을 한참 지켜보다가/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고 축인 뒤/큰아버지는 안 오셨지만/'아부지예, 할무이가 큰아부지 오셨다고/아부지 집에 오시라 카던데예'/아버지는 헛기침을 몇 번 하시며/'그래 알았으니 곧 간다캐라'

-졸시, 「거짓말 연습」 전문

남자들이 놀고 있는데 여편네가 아이를 보내 부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큰아버지는 안 오셨지만, 할머니가 호출하는 형식으로 자존심을 세워주어야 한다. 주막집 마당에 들어가서도 아버지를 부르는 타이밍을 잘 잡아야 했다. 노름꾼들이 손 놀리는 그림자가 창호지에 다 비쳤다. 패를 돌리거나 화투장을 죄는 긴장된 순간에는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되었다. 한 판이 끝나고 다시 화투를 섞기 직전에 불러야 했다.

◆할머니는 무형문화재 1호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문자를 통해 사투리를 교정할 기회가 없으니 대구와 친정 칠곡의 사투리를 온전한 형태로 보존하였다. 9남매 막내인 나는 맞벌이여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다. 우리 둘째는 할머니와 띠동갑으로 72년 차이가 난다. 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우리 집 무형문화재 1호다. 너희들은 할머니 살아계실 동안 사투리를 많이 전수받도록 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 집은 더버서(더워서), 추버서(추워서), 미버서(미워서) 같이 순경음 'ㅸ'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고, 짐치(김치), 참지름(참기름), 질 가다가(길 가다가)와 같은 구개음화 현상도 자연스럽게 살아있었다. 지금도 객지에 사는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할머니의 사투리와 어투를 흉내 내며 할머니를 추억한다. 한 번은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에게 영천 출신 이종문 시인의 시를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머/너거무이 볼 때마다 다짜고짜 안아뿌라/그라고 젖 만저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발칵 내실끼다/다 큰 기 외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 이종문, 「효자가 될라 카머 – 김선굉 시인의 말」 전문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함과 그 속에 스며있는 따뜻한 정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아이들은 박장대소했다.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며 익힌 사투리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저희끼리 만나 대화할 때는 사투리를 쓰고 있으니 이 시를 바로 이해하며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사투리 사용은 창의적 사고의 원천

어떤 분야에서든 최초의 창조적 영감과 직관은 대개 모국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가 인간의 생존 기반 자체를 위협하듯이, 언어 다양성의 감소는 인류 전체의 창의성과 상상력의 빈곤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S. 로메인 교수는 "인간은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수민족의 언어는 보호되어야 한다. 세계 언어의 유지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필요하다. 한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복리 증진의 관점에서도 언어의 다양성은 중시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사투리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지역의 독특하고 섬세한 문화 콘텐츠는 그 지역 고유 언어를 통해서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사투리는 시, 소설,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을 통해 기록하고 실생활에서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사투리의 보존과 활용은 지역 문화의 정체성과 경쟁력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글 윤일현 시인. 대구시인협회 회장

그림 손부엉 일러스트레이터 . 오티스 아트 앤 디자인 칼리지 졸업.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수료

이 기사는 계명대학교와 교육부가 링크사업으로 지역사랑과 혁신을 위해 제작했습니다.

◆다시, 사투리 연재 순서

1.왜 다시, 사투리 인가

2.예술 속 사투리

3.사투리와 사람들

4.외국의 사투리 보존과 현황

5.대담

◆사투리 연재 자문단

김주영 소설가

안도현 시인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

김동욱 계명대학교 교수

백가흠 계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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