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102년 전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통치를 극복하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펼쳤던 3‧1절이다.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갔고 대구에서는 3월 8일에 일어났다. 3·1운동 직전 1월 21일 고종황제의 승하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어 온 백성이 격앙했고 어느 지역보다 선비와 충절의 고장인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마지막 황제에 대한 애도와 망국의 비애가 크게 끓어올랐다.
가장 규모가 컸던 3월 8일 대구 봉기는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이 2월 24일 대구에 파견되어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협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만집 목사는 남산교회 조사 김대련,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 백남채와 상의하고 큰장(서문시장)날을 거사일로 정해 학생과 민중 동원에 착수했다. 거사에 참가한 학교는 대구고보(현 경북고등학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성경학교가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학생과 종교인, 그리고 수많은 시민이 참석했다.
조선헌병대는 이 기간 대구경북 지역에서 90회 집회가 있었고 집회로 인한 사망자 25명, 부상자 69명, 수감자가 700명이었다고 축소 발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의 집계에 따르면 대구 사망자 212명, 부상자 870명, 수감자 349명이며 경북 의성에서 사망자 230명, 부상자 295명, 수감자 250명으로 두 곳만 합쳐도 사망자가 442명이나 되었다.
거사일이 늦었음에도 그 기세가 격렬했고 희생자가 많았던 이유는 서구자본주의 침투에 반대하여 반제국주의 기치를 든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운동 이후 확산된 민중운동의 계승이었다. 대구경북지역은 임진왜란뿐 아니라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으로 들어온 일제의 세력이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경제적‧군사적 요충지로 우선 공략, 잠식되어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5월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미리 합세하지 못했던 경북 유림은 경남·북 유림을 결집하여 파리장서운동을 펼쳤다. 주축이 된 138명 유림 중 60여 명이 경북 출신이다. 한국독립청원서가 김창숙 등에 의해 파리강화회의에 비밀리에 보내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곽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유림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3·1독립운동에 놀란 일제를 재차 강타한 사건이 파리장서운동이었다.
이처럼 대구경북 3·1만세운동은 그 규모와 내용면에 있어서도 타 지역에 비할 바 못 되었다. 또 3·1만세운동 전 1907년부터 1908년 대한민국을 일본 경제에 예속시키려는 저의로 일제가 제공한 차관을 갚기 위해 범국민적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던 곳도 이곳이다.
일제에 일시적으로 나라가 빼앗겼다 해도 민족혼이 담긴 봄마저 저들이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대구 근대화 골목 3·1만세 운동길을 따라 그때의 함성을 들어보자.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 서상돈 고택을 둘러보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구가 새겨진 보도를 걸으며 이상화의 마음과 동화되어 보자.
유대안 대구합창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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