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미나리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미나리는 가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모두가 구정물을 길에 버리던 1970년대. 흙길 옆 움푹 파인 수채통에는 어김없이 미나리가 자라고 있었다. 비눗물에 밥알까지 널려 있던 그 더러운 곳에서 연초록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은 희한한 풍경이었다. 미나리는 그렇게 폐수 속에서 싹을 틔웠다. 타고난 정화력 때문이었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제목에서 이미 한국인들의 끈끈한 삶의 생명력을 은유한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새로운 희망을 일구는 한 한인 가족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지속되어야 할 삶의 위대함을 잔잔하게 웅변하는 영화다.

1980년대 미국 아칸소의 외진 농지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온다.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번듯한 전원주택을 꿈꾸었지만,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비 새는 이동식 간이주택. 여기서 살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하다.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은 대농장의 꿈을 얘기한다.

"여기 토양의 질이 미국 최고야!"

그는 한국인들이 좋아할 작물을 키워 슈퍼마켓에 팔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아내를 다독인다.

딸 앤(노엘 조)과 아들 데이빗(앨런 S. 김)은 넓은 초원이 신기하기만 하다. 다만 데이빗이 심장질환을 가지고 있어 부부는 걱정이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미나리'는 이 가족이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아내의 불평으로 봐서 캘리포니아에서도 넉넉하게 살지 못했고, 사업도 손대는 것마다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아칸소의 농장은 이 부부의 희망찬 미래일 수도 있지만, 파경의 소지도 갖춘 벼랑 끝 지점이다.

부부는 병아리 감별공장에서 일하면서 시간을 쪼개 땅을 일군다. 저축한 돈은 줄어들고, 덩달아 부부의 갈등도 깊어진다. 이때 고국에 있던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가 온다. 한국 할머니의 등장으로 가족은 어수선해진다. 순자는 전통적인 한국 할머니다. 순자가 멸치와 고춧가루 등과 함께 가져 온 것이 미나리 씨앗. 그리고 척박한 땅에 그 씨앗을 뿌린다.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그는 1978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칸소 시골 농장에서 자랐다. 그가 기억하는 많은 한국적 요소들이 영화 속에 녹아 있다.

그동안 미국 이민의 역사를 그린 영화들은 많았다. 대기근을 피해 뉴욕항에 내린 아일랜드인, 1900년대 뒤이어 들어온 이탈리아인 등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들은 대부분 스펙터클한 화면에 웅장한 서사로 그들의 혹독한 삶을 미화했다. 거기에 노스탤지어 정서로 관객을 유혹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나리'는 지극히 소박하면서 정적인 영화다. 이들을 괴롭히는 것도 물 부족이나, 비가 새는 것, 아이가 아픈 것 등 너무나 소소하고 생활적인 것이다. 내러티브는 잔잔하고, 기승전결도 파고가 높지 않다. 왜곡되거나 과장하지도 않는다.

감독은 이를 '진심의 언어'라고 했다. 영화적 유머 코드도 손주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오줌 싸는 손자에게 보약을 달여 먹이고, "고추가 고장났다"며 놀리는 할머니의 투박함 정도. 회초리를 드는 아빠의 모습도 미국인이면 질겁할 수 있지만, 한국적인 유쾌함으로 풀어낸다.

'미나리'가 돋보이는 것은 이런 담담한 연출 때문이다. 거창한 내러티브의 기교 없이 잔잔한 수면 아래에 흐르는 희망의 메시지를 관객들이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가족의 위기와 고난 극복은 꿈을 갖고 정착하는 미국 이민사를 응축하고 농축한 것이다. 문화적 다름도, 종교적 신앙도 용광로 속에 녹여 무지개로 승화시키려는 미국 이민의 상징인 셈이다. 그것을 감독은 미나리가 가진 식물적 특성과 함께 'water dropwort'가 아닌 'minari'라는 한국명으로 이 가족의 끈기와 신뢰를 얘기하고 있다.

배우 윤여정이 열연한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배우 윤여정이 열연한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미나리'가 현재까지 들어올린 트로피는 75개에 이른다. 특히 윤여정 씨의 연기에 미국 관객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관객에게는 너무나 익숙해 다소 밋밋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신선하면서 새로운 영상 문법으로 다가온 것이다.

'미나리'는 미국영화다. 한국어 대사가 50%가 넘고, 배우들이 모두 한국인들이지만, 제작사가 미국의 '플랜B'이기 때문이다. 배우 브레드 피트가 세운 영화 제작사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미국영화로 분류되고, 골든글로브가 외국어영화상을 수여하자 "미국영화에게 외국어영화상이 말이 되느냐?"며 인종차별이라고 반발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제작비만 달러였지 '미나리'는 한국영화다.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기질이 전편에 녹아 있고, 그 모든 것을 한국 영화인들이 한국식으로 엮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미나리' 같은 독립 저예산 영화에 열광하는 미국 관객의 태도가 놀랍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다. 그만큼 한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친밀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지난해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 낭보에 이어 다음달 25일(현지시간) 열리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가 거둘 수확도 기대된다.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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