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박수철(가명·36) 씨는 지난달 23일 대구 한 대형마트에서 와인 코너를 구경하다 의아한 점이 생겼다. 일주일 전 같은 그룹 계열사 백화점에서 12만원에 판매하던 페리에주에 그랑브뤼(750㎖) 한병을 해당 마트에선 반값 수준인 5만7천원에 판매하고 있던 것이다.
박 씨는 "계열사 백화점과 마트가 같은 와인을 천지차이 가격으로 판매하는 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샀다면 큰 손해를 볼 뻔 했다"고 말했다.
홈술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와인 인기가 높은 가운데, 와인이 '적정 가격' 없이 판매처마다 큰 가격차이를 보이고 있어 소비자들이 의문을 갖고 있다. 유통업계는 와인 경우 각 판매처의 수입량이나 협상 내용, 행사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인기 와인 '1865', 최대 1.7배 차이
4일 대구 유통업계에 따르면 한국인이 사랑하는 칠레 산페드로 사의 대표 와인 '1865'는 판매처에 따라 평소 2만7천~4만7천원 선에서 판매되고 있다. 세계 80여개 국에서 판매하는 이 와인은 유독 한국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어 국내 수입량도 꽤 많은 편이다.
판매처별로 보면 이마트는 폎소 이 제품을 4만7천원에 판매하다가 지난 3일부터 행사가격 2만7천원대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마트 트레이더스는 2만9천원대에 판매 중이다. 또 대구신세계는 3만5천원에 판매한다. 가격 차이가 최저가 기준으로 1.7배까지 나는 셈이다.
반대로 정상가가 11만원인 '콘차이토로 떼루뇨 카베르네 소비뇽'은 이마트 등지에서 행사가격 5만원이라는 절반 이하 가격에 판매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격이 기준 없이 들쑥날쑥한 것은 각 유통업체 본사 바이어가 와인을 매입, 공급하는 전략에 따라 가격이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국내 주류 관련법상 유통업체는 모든 주류를 제조사와 직거래할 수 없고 도매상을 거쳐 매입해야 한다. 이때 유통업체가 수입사(도매상)에서 특정 와인을 대량, 정기 구매한다면 해당 제품 가격을 협상하기가 유리하다.
대형마트 기업인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은 잘 갖춘 유통망과 재고 관리가 가능한 대형 창고를 둔 만큼 와인을 대량 공급하는 조건으로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다. 종종 마트가 얻을 수 있는 와인 판매 마진을 낮춰 가며 할인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대형마트 와인 판매코너의 절반 이상은 외부 주류 수입사가 직접 입점해 와인을 판매하는 식인데, 나머지 공간을 직영하는 대형마트 측이 와인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하면서 고객을 끌어들이면 수입사도 덩달아 공격적으로 가격 정책을 펼치며 선의의 경쟁 구도를 형성하곤 한다.
창고형 매장인 이마트 트레이더스나 코스트코 경우 대량 매입, 대량 판매를 전제로 하고 있어 일반 대형마트보다도 더욱 저렴하게 와인을 들여올 수 있다.
백화점은 대형마트보다 재고를 두고 관리할 공간이 많지 않다. 그런 만큼 수요가 많아 회전율이 높거나, 쉽게 구하기 힘든 프리미엄 제품을 소수만 들여와 비교적 고가에 판매하고 있다.
그 대신, 대형마트에선 대체로 손님이 스스로 와인을 선택해야 한다면 백화점에선 와인 지식이 풍부한 직원이 손님에게 알맞은 와인을 추천하며 응대한다. 백화점 경우 와인 단가가 높은 만큼 VIP 회원 자격을 부여하는 구매 실적을 쌓기에도 좋다.
대구 한 백화점 관계자는 "같은 제품도 상대적으로 비싸게 판매하는 대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등 고객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와인에는 정가 없다"…가격 비교검색 필수
이런 이유로 와인 애호가 사이에는 '와인 가격에는 정가가 없다'는 말이 통용될 정도다. 특정 매장에서 '할인가'라는 말에 혹해 구매했다가, 나중에 다른 매장에서 훨씬 싼 가격을 보고 일종의 배신감을 느낄 일이 비일비재하다. 애호가들은 이런 사례를 숱하게 겪다 보니 나중엔 아예 초연해지곤 한다.
한 와인 애호가는 "라면을 봐도 수퍼마켓에서 사서 끓여먹으면 1천원, 호텔에서 사먹으면 1만원 등 판매처에 따라 차이가 난다. 서비스 비용이 포함됐느냐, 마진을 대폭 낮췄느냐 차이가 있음을 감안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백화점은 고가 와인, 편의점·대형마트는 저가 와인'이라는 공식도 깨지는 추세다. 편의점은 희귀 와인을 미끼상품으로 판매해 편의점 방문을 유도한다. 반대로 백화점은 '고가 매장' 공식을 깨려 와인 입문자를 불러 모을 저가 와인 품목을 늘리고 있다.
유통업계는 경기불황과 온·오프라인업체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유통채널의 가격공식이 깨졌다고 풀이한다. 특히 지난해 코로나19로 타격 입은 백화점과 편의점 등 전통적 오프라인 업체들은 새로운 가격정책으로 소비자를 불러 모으느라 바쁘다.
그럼에도 같은 와인을 더욱 저렴하게 사고자 한다면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유통업계는 소비자 스스로 선호하는 와인을 정한 뒤 다양한 판매처에 발품을 팔아 보기를 추천한다. 때와 곳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면, 특정 제품을 상시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이 정해져 있을 수 있다는 이유다. 한 유통업체에서 와인 할인 행사를 하고 있다면 이런 정보를 미리 파악하는 것도 도움된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시간 여유가 된다면 직접 다녀봐도 좋고, 그렇지 않다면 각 유통업체가 제공하는 홈페이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살펴봐도 실제 판매가와 별다른 차이 없이 가격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와인 애호가들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와인서쳐'(wine-searcher)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앱은 와인 이름을 입력하거나 와인 라벨 사진을 업로드하면 해당 와인의 해외 매장 판매가격과 평균 거래가격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1865 싱글 빈야드 까베르네 소비뇽'을 검색하면 곳에 따라 한화 1만3천원에서 200만원(세금 제외)까지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국내에서 술에 붙는 세금이 타 국가보다 높고, 해외 거래가의 2배 정도가 국내 적정 가격임을 고려하면, 국내 대형마트에서 세금 포함 3만원 안팎에 판매하는 이 제품은 저렴한 편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명절 등 주류 판매량이 많은 행사 시즌에 행사매대 진열 상품을 구매하거나, 연간 1~2회 와인을 싸게 파는 '와인 장터' 할인가를 기준으로 구매하면 합리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한편, 평소에 즐기기 좋은 1만원대 가성비 와인으로는 고기와 먹기 좋은 칠레산 레드 와인 '디아블로 카베르네 쇼비뇽', 이탈리아산 꽃향기 나는 상큼한 디저트 와인 '카스텔로 델 포지오 모스카토 다스티', 초콜릿과 곁들이기 좋은 '간치아 모스카토 다스티' 등이 있다.
댓글 많은 뉴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