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동경작안(東京炸案)

'동경(東京)'은 일본 수도 도쿄를 말하고, '작안(炸案)'은 폭탄투척 계획이란 뜻이다. 항일투사 이봉창(李奉昌·1901~1932)이 왜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진동전세계'동경작안'지진상(震動全世界'東京炸案'之眞相)"은 김구의 발표다. 중국 '신강일보'는 한국청년 이봉창이 왜왕을 저격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일본의 안방 동경에서 왜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일은 세계를 진동시킬 일이었다.

이봉창은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손 씨의 둘째아들로 현 서울 효창동118-1번지에서 살았다. 1915년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과점원을 거쳐, 1920년 용산 역무원 때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4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퇴직하고 그 해 9월,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폈다. 1925년 범태(範泰) 친형과 일본 대판(大阪)에서 철공일을 하다, 일본인 양자가 돼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臧)로 바꿨으나 조선인으로 밝혀졌다. 1928년 일왕 히로히토를 보기위해 나갔다가 일경수색에서 한글 편지가 발견되어 10일 동안 구금당했다. 이때 불온한 사람이라는 혐의를 받자 심정의 변화를 일으켜 조국을 위해 투신하리라 다짐했다. 내 작은 힘이지만 조국의 원수를 처단할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1930년 12월 동지들과 뜻을 모아 일을 도모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

결기에 찬 마음으로 김구를 만나 심중을 털어 놓았으나, 거동을 수상히 여기며 의심하는 눈치였다. 술자리에서 봉창이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왕을 왜 안 죽이느냐! 원흉의 우두머리를 처단해야 하지 않느냐!'며, '내가 작년에 일왕이 능으로 가는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 내 손에 폭탄이 있었다면 일왕을 죽일 수 있었다'고 했다. 이에 김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키고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했다. '이 군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하자 겸손한 태도로 '나라를 위해서라면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김구 말꽃 모음'에 기록했다. 1931년 12월에 김구는 폭탄 2개를 구입하여 안중근의 동생 공근 집에서 선서식을 갖고, 양손에 폭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도쿄로 건너간 봉창은 1932년 1월 8일 '물건은 틀림없이 팔린다'고 연락하고 만주의 황제 부의(溥儀)와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하여 폭탄을 던졌다.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30일 일본 최고 재판소 1심에서 사형을 확정하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에 교수형을 당했다.

비록 목적달성엔 실패했지만 일왕 폭살기도는 천지를 진동시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특호활자로 대서특필 했고,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의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고 중국인들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했다. 세계 각 신문들도 앞다투어 톱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1932년 5월 10일 김구는 로이터통신을 통해 '이봉창에 대한 애도문'을 싣고 김구 자신과 임시 정부가 배후임을 밝혔다. 1946년 이봉창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치했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임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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