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되길 잘 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들어요. 일반 환자들에 대한 치료도 보람이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든 우리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시민들의 격려 덕분에 다행히 스트레스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인 김용한(47) 씨에게 지난 1년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대구 첫 코로나19 환자 발생 이후 의료진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봉직의(奉職醫) 신분이지만 소속 병원의 양해를 구하고 자원봉사에 나선 날이 적지 않았다.
"물론 위험한 일을 자청한다고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함께 봉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동료 의사들에게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득했죠."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서 영남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를 맡고 있다. 언론 대응은 물론 작년 2월 말 이후 입원 대기자가 크게 늘었던 때는 확진자 상태를 파악하는 전화 상담에 투입됐다. 생활치료센터가 속속 문을 열면서부터는 검체 채취 지원을 맡았고, 현재는 대구에 한 곳뿐인 중구 임시선별검사소(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를 지키는 유일한 의사이다.
"전화 상담을 하루 20여 명씩 했었는데 기억에 남는 분들이 꽤 됩니다. 18개월 된 아이를 두고 혼자 입원할 수 없다며 오열하시던 30대 주부 확진자, 기저질환을 앓는 남편이 자신에게서 감염될까 봐 하루라도 빨리 입원시켜 달라고 조르시던 70대 할머니…. 인턴, 레지던트 시절 이후 죽음과 맞닥뜨릴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생명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김 이사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2월 21일 대구시민의 날 기념식에서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탠 '시민 영웅'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됐다. 자신의 지게차를 직접 몰고 봉사한 박주순 조은전동지게차 대표, 코로나19 전담병원(계명대 동산병원)에서 헌신한 김경란 간호사, '10년 기부에 앞장서 온 익명의 시민'과 함께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솔직히 제가 받을 상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환자들을 돌보며 저보다 더 고생하는 의료진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구시의사회는 의료체계 공백을 메꾸는 역할을 했고, 저는 마침 상황이 맞아 떨어져서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다만 초등학생, 중학생인 제 아이들이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말해줬을 땐 정말 뿌듯했지요."
그는 대구시의사회가 지난해 봄 대구의 코로나 1차 유행 당시 100일 간의 기록을 담은 백서(白書)를 발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책에는 세계 최초였던 드라이브 스루 검사, 생활치료센터 운영 등 의사회 활동이 330여 쪽에 걸쳐 자세히 소개돼 있다. 특히 마지막 장인 '남겨진 숙제와 새로운 준비'에선 ▷행정·의료기관을 실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의 상시 설치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 사이 소통을 위한 기구 설립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한 언론 대응 시스템 구축 등 향후 과제들을 제안헸다.
백서는 일반적으로 정부가 정치·외교·경제 등 각 분야의 사건·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여 그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만든다. 그래서 특정 이슈가 마무리될 즈음에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부도 아닌 대구시의사회가 왜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 3월부터 백서를 준비했을까 궁금했다.
"본격적인 집필은 지난해 5월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료 사진 확보, 객관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죠. 팬데믹이 여전한 상황에서 백서를 펴낸 것은 최일선에서 보고 느낀 의료 현장이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정확하게 알려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제2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칫 현실에 안주할 수도 있는 나이에 봉사를 통해 의사로서 사명을 다시 깨달았다는 그는 이달 말 중구 임시선별진료소가 운영을 그만두면 일상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좀 더 내고, 미뤄뒀던 공부도 다시 할 계획이다. 그는 이번 경험을 통해 세계보건기구(WHO) 같은 국제 전문기구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상황이 하루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러시겠지만, 저 역시 지난 1년여 동안 사적인 약속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검체 채취 등을 도왔던 생활치료센터·선별진료소·보건소와 집만 오가며 조심조심 지낼 수밖에 없었죠. 이제 백신도 보급되고 있고, 지역의 확진자도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서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꼭 마스크 벗고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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