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 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24번째 이야기. 풍산장 체화정
'봄꽃'은 성격이 급하다. 봄 기운을 살짝만 느껴도 지체없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빼꼼이 고개를 내민다. 얼마나 급한지 잎이 움트기도 전에 꽃부터 피우는 꽃들이다. 순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자연의 섭리지만 성격 급한 봄꽃은 참지 못한다.
눈 내리는 겨울,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동백은 붉디 붉은 꽃잎째 떨어뜨리며 전령사 노릇 마다하지 않는다.
남도는 봄꽃이 한창이지만 산골 깊숙한 안동에는 봄꽃 소식이 이제 '올락말락'한다.
여긴 동백도 보기 어렵다. 그래도 순서대로 피는 봄꽃들이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 봄비 촉축히 내리면 목련이 활짝 필 것 같다. 이미 홍매화는 곳곳에서 나홀로 붉은 자태를 뽐낸다. 산수유도 시작이다. 이제 매화와 목련이 나올 차례다. 꽃들도 순서를 안다. 아무리 성격이 급하다고 해도, 기상 이변 현상이 이상하지 않더라도, 꽃들도 제 차례를 안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3월 중순이 지나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온세상을 울긋불긋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 때쯤이면 진달래 한 잎 따다가 화전(花煎·꽃전)을 부쳐 먹거나 막걸리 잔에 진달래 꽃잎 동동 띄워 두견주 마시는 호사라도 누리고 싶다.

사는 게 얼마나 삭막한지, 도심에 사는 도시인들은 빌딩숲 한 켠에 심어놓은 자목련 한 그루만 봐도 하루가 즐겁고, 동네 골목 어귀에서 만나게 된 마당 깊은 집에 핀 봄꽃만 발견해도 반갑다.
봄의 섭리란 건 아무리 추운 동장군의 기세등등했던 겨울도 한 철뿐이란 걸 해마다 깨닫게 해주고 늘 봄은 새로운 봄이라는 것이리라.
체화정
안동에서 예천 방향으로 가다가 만나는 풍요로운 마을이 있다. 풍산이다. 풍산개의 원산지인 함경도 풍산과 지명이 같다. 풍산은 요즘 코로나 사태의 첨병으로 이름을 알린 AZ(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위탁생산하는 SK바이오사이언스 안동공장이 있어 바이오산업의 메카로 급성장하고 있기도 하다.
풍산장터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정갈하고 깔끔한 정자 한 채를 만나 깜짝 놀라게 된다. 어떻게 이런 시끌벅적한 대로변에 세상과 담을 쌓은 듯 평온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화정(棣華亭)이다. 안동에는 곳곳에 정자들이 산재한다. 하나같이 선현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이 있는 정자들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가 되기도 한 만휴정과 고산정도 있고 체화정과 소호헌 같은 나름의 역사와 사연을 담은 정자도 즐비하다.
체화정은 조선 중기라고 할 수 있는 영조 37년(1761)에 죽사 이민적이 형인 이민정과 함께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다진 곳이라는 의미에서 '체화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체화(棣華)는 상체지화(常棣之華)의 줄임말로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을 의미한다고 한다. 〈시경〉(詩經) '상체'편에 나오는 말로 산앵두나무의 꽃은 수많은 꽃잎을 갖고 있는데 이는 형제가 많아서 집안이 번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체지화(棠棣之華)라고도 한다.


추측컨대, 체화정을 지은 이민적이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고 그저 '진사'(進士)였다고 하니 아마도 학문을 닦기보다는 형과 함께 정자에 올라 어울려 놀면서 풍류에 더 몰두하지 않았나 하는 여담도 들을만 하다.
눈앞에 보이는 단아한 체화정을 보고 풍류를 떠올린 건 정자 앞의 인공연못과 인공섬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체화정 바로 앞으로 큰 길이 뚫리는 바람에 정자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지만 체화정에 올라 연못안의 '삼신산'을 바라보는 것도 꽤나 운치가 있다.
체화정 앞의 네모난 연못에는 세 개의 둥근 섬이 조성돼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아시아 전통 우주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체화정 앞에 설명문이 알려준다. 이 세 개의 인공섬은 신선이 사는 '삼신산'을 의미한다. 중국 전설에서 유래한 삼신산(三神山)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으로 불로불사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체화정을 지은 때가 탕평책을 시행한 영조시대니까 그나마 안동 선비들에게는 태평성대와 같은 호세월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체화정은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1호로 승격했다. 정자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꾸며졌다. 살림채도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정자의 전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로 되어 있고, 그 안쪽에 온돌방을 들이고, 좌우에 우물마루로 마감된 마루방이다. 온돌방 정면에는 '눈꼽째기창'이라는 작은 창을 내서 문을 열지 않아도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한 것이 독특하다.
체화정이라는 현판 안쪽에는 담락재(湛樂齋)라고 쓴 이중 현판이 있어 눈에 들어왔다. 형제간 우애가 돈독해야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조선 최고의 서화가 김홍도(金弘道)의 글씨다.
체화정을 보다가 고산 윤선도가 말년을 보낸 남도의 끝 보길도에 지은 세연정이 떠올랐다.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들른 보길도의 풍광에 빠져 눌러앉은 고산은 이곳에 세연정을 비롯한 여러 누각을 짓고 어부사시사 등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세연정이 자리한 원림과는 차이가 있지만 단아한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원림을 조성, 은둔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고산의 시대보다 100여년 뒤인 조선 중기 선비들의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겠다.
세연정엔 지금 목련이 뚝뚝 꽃잎채 떨어질 테지만 체화정 앞뜰의 목련이 이제야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노오란 산수유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키낮은 목련과 산수유에게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봄냄새가 그윽하게 코끝을 찔렀다.
'체화정의 봄'이다.

*** 풍산장
체화정에서 100여미터만 걸어 내려가면 풍산장터가 나오고 거기서 부터가 풍산읍내다. 가는 길에 문닫은 풍산 시외버스정류장도 나오고 소달구지를 끌고가는 농부와 주막집 벽화도 정겹다.
풍산(오일)장은 1917년경에 현재의 자리에 형성돼 인근의 안동구시장과 더불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장은 매월 3, 8일에 열리지만 지금은 과거와 같은 북적거림도 없는 시골장이다. 당시 곡물과 과일 철물 땔감 기름 등이 주로 거래되었을 텐데, 시장 곳곳의 조형물들 중에는 지게에 나무를 해서 파는 나무꾼들이 많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풍산읍내는 이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돼있다. 시장은 오일장이 서는 날에만 반짝하고 평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그래도 돼지국밥식당도 있고 한우갈비식당, 횟집과 치킨집 분식집 등 있을 것은 다 있고 없는 건 없다.
대형마트가 우리 소비 생활을 장악했다. 과거와 같은 오일장이 성황을 이루는 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장터에 가면 그 시절과 장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장날이 돌아오면 전국 각지를 떠도는 장꾼들이 자리를 잡고 온갖 물건들을 선보이고 마트보다 장날을 기다려 온 어르신은 어슬렁 어슬렁거리며 장을 보고 국밥집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낼 것이다.
풍산장터 입구에는 방송에도 소개된 유명한 대구식육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소불고기와 돼지주물럭 등이 인기품목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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