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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중남미 디지털협력포럼에 참석하는 중남미 4개국 장관 및 대사 접견에서 발언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중남미 디지털협력포럼에 참석하는 중남미 4개국 장관 및 대사 접견에서 발언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끝까지, 묵묵히 다 읽습니다. 비판하는 기사로 도배가 돼 있는 날도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다 읽죠. '저렇게까지 꼼꼼하게 읽을 수 있나'라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렇다고 비판 기사에 대해 버럭 화를 내는 일도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밖에 나와 있는 한 인사가 기자에게 이렇게 얘기한 기억이 있다. 문 대통령은 언론의 비판 기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최근 그야말로 낯선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에 농지가 형질 변경돼 편입됐고 이로 인해 큰 차익을 보게 됐다는 야당의 공세에 대해 직접 나서 비판의 화살을 날린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자신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 글을 올려 "선거 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라.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며 야당에 대해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진영을 결집시키는 효과는 있겠지만 들끓는 민심을 다독이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지시로 글이 결국 게시됐다는 후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야당이 경남 양산 사저 부지를 두고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야당이 경남 양산 사저 부지를 두고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며 "선거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시지요"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의 평소 어투에 비춰 이례적으로 강한 톤이어서 주목된다. 연합뉴스

과격한 언사를 하지 않는 문 대통령이 '돌변한'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문 대통령은 민생경제 분야의 핵심 과제로 집값 안정을 내세웠고 여러 차례 이 부분에 대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보다 강력한 대책을 끝없이 내놓겠다. 임기 내 부동산만큼은 확실히 잡겠다"고 수차례 단언하면서 집값 안정을 위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어 왔다. 일관성 있는 정책 사령탑이 필요하다면서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오랫동안 재임시켰다. 그러나 25차례의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은 잡히기는커녕 더 올라갔다.

결국엔 국민들의 인내 임계점을 넘어서는 이른바 초대형 부동산 투기 사건인 'LH 사태'까지 터졌다. 이런 판에 야당이 문 대통령 양산 사저까지 농지 투기의 현장으로 몰아세웠고, 문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문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송구하다고 머리를 숙이긴 했지만 국정 전반을 운영해 나가는 태도가 바뀔 조짐은 없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문 대통령은 국정에 대한 야당의 비판을 '정쟁'으로 규정, 이를 조언과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지속하는 모습을 또다시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LH 사태와 관련, 야당에 대해 "이 사안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의 코로나19 대처 과정에 대한 야당의 비판이 나와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정쟁을 자제해 달라"고 말했었다.

민주주의는 반대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 대통령이 자주 소환하는 단어인 '정쟁'이 일상화한 정치 체제다. 이따금 만장일치가 가능은 하겠지만 만장일치·일사불란이라는 목소리는 다원주의를 핵심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에는 치명적 상처를 안기는 것이다.

정쟁을 인정해야 하며, 자신을 타자화(他者化) 함으로써 상대의 의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나와 대립하는 상대 진영을 경쟁해야 할 반대자로 봐야지, 파괴해야 할 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건전한 민주주의의 과정은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왕성한 충돌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젊은 시절부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문 대통령의 여러 발언을 들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대통령의 몰이해가 느껴진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로 가고 있다는 걱정은 기자만의 우려일까?

서울정경부장 겸 편집위원
서울정경부장 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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