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문재인의 유체이탈 사과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과는 어렵다. 그래서 사과답지 않은 사과를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이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런 면피성 사과는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의 격한 반발을 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사과는 그 대표 격이 될 만하다.

1932년 미국 공공보건청은 흑인들을 대상으로 치료하지 않는 매독의 진행 경과를 연구했다. 그들에게 매독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연구 도중 페니실린이 매독 치료에 매우 효과적임이 밝혀졌는데도 투여하지 않았다. 이 연구는 40년간 지속됐는데 그 사이 연구에 참여한 흑인 28명이 매독으로, 100명이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 배우자 40명이 감염됐다.

1972년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1천만 달러의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피해자들과 합의했으나 공식 사과는 계속 미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런 침묵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1997년 미국 정부가 사과한다고 했다. 그 표현은 직설적이었다. "미국 정부는 깊이, 심각하게,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한 표현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1998년 4분짜리 대국민 사과에서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추문을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에둘러 말했다. 언론에서는 '부적절한' 이란 단어가 매우 부적절하게 사용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저명한 부흥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크 그레이엄은 더 매섭게 비판했다. "클린턴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죄를 인정하고 모호한 언행을 삼가야 한다. 성경대로 하자면 대통령은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 간통을 저질렀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도 마찬가지다. 과거 정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사과했다. 2018년 제주 4·3사건 70주년 추념식에서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난 LH 사태에 대해서는 달랐다. "국민께 송구한 마음"이라면서도 "부동산 적폐"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번 사태가 과거 정부에서 누적된 '적폐'라는 것이다. '무슨 사과가 이래?'라는 소리가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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