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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주사위는 던져졌다”…‘부패완판’의 슬로건 정치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3월 15일, 4·19 혁명 도화선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떠오른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돌려 이탈리아 로마로 가면 B.C. 44년 3월 15일에 이른다. 로마 공화정을 지키려는 절박한 칼부림 속에 난세 영웅 카이사르가 57세에 나뒹군 날이다. 브루투스를 비롯해 공화파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쓰러트린 곳은 공화국 청사 코미티움 앞이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터는 남았다. 로마포럼(포로 로마노) 서쪽 끝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 앞이다. 여기서 동쪽 콜로세움 방향 150여m 지점에 카이사르 신전이 자리한다. 탐방객들은 여기서 로마의 위세를 떨친 영웅이지만, 공화정을 독재정으로 바꾼 카이사르의 역설적 삶을 곰곰 되새긴다.

카이사르 로마동전
카이사르 로마동전

카이사르의 공과를 일단 뒤로 제쳐 두고, 그의 탁월한 언어 감각, 지지자들을 결집해 반대파를 제압하는 메시지 정치의 구호를 살펴보자. 먼저 '이악타 알레아 에스트'(Iacta Alea Est·주사위는 던져졌다). 사전에는 '일이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단행하는 수밖에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121년 '황제전'(De vita Caesarum)에서 카이사르가 B.C. 49년 1월 10일 이탈리아 반도 중동부의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행진하며 휘하 병사들에게 이 말을 했다고 적는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알렉산드리아 항구
알렉산드리아 항구

B.C. 509년 공화국으로 전환한 로마는 소집된 군대가 해외 작전을 마치고 귀국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자동 해산하도록 했다. 군 지휘관이 시민병사들을 사병화해 쿠데타로 공화정을 뒤엎지 못하도록 한 조치다. 갈리아(프랑스)에 나가 공을 세운 카이사르는 제왕의 야망을 품고, '권력을 잡아 새로운 로마를 건설할 테니 나를 따르라'는 불가역의 정치 메시지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병사와 로마 시민에게 외친 것이다. 이 말의 원작자는 B.C. 4세기 탁월한 그리스 극작가 메난드로스다. 적절한 시점에 재활용한 카이사르의 언어 감각이 돋보인다.

로마 포럼 개선문. 앞쪽이 카이사르 암살장소. 사진 오른쪽 아래 사람들 모인 곳 건물이 카이사르 신전.
로마 포럼 개선문. 앞쪽이 카이사르 암살장소. 사진 오른쪽 아래 사람들 모인 곳 건물이 카이사르 신전.

카이사르의 창작 구호도 귀에 익숙하다. '베니 베디 베키'(Veni Vedi Ve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루비콘강을 건넌 쿠데타로 공화파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카이사르는 B.C. 4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여기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2세 꽃다운 여왕 클레오파트라(그리스 혈통)와 사랑을 나눈다. 그때 터키 땅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 반기를 들자 클레오파트라 품을 떠나 출정 나팔을 분다. 터키 수도 앙카라 북쪽 젤라 전투에서 B.C. 47년 승리를 거둔 뒤, 로마 원로원에 '와서 보고 이겼다'고 서한을 보냈다. 치기 어린 자랑질이 아니다. 아직 공화파를 모두 제거하기 전이다. 이 구호를 통해 누구든 자신에게 대항하면 보는 순간 제압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띄운 것이다. 2년 뒤 공화파에 암살당하고 말지만….

폰투스 왕국이 있던 카파도키아.
폰투스 왕국이 있던 카파도키아.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아직 남북전쟁의 포성이 멎기도 전인 1863년 11월 19일,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의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몇 분짜리 짧은 연설 속 구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는 그 간결함에도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카이사르 암살자 브루투스.
카이사르 암살자 브루투스.

2013년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댓글 수사 외압을 폭로하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간명한 말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윤석열 전 검찰총장. 지난 3월 4일 사퇴 하루 전 대구고검에서 "'부패완판' 속 법치 수호"라는 창작 구호를 화두로 던졌다. LH 관련 투기가 국민 가슴에 불을 지른 형국에 '부패가 완전히 판친다'는 메시지는 아직 정치의 '정' 자도 꺼내지 않은 그를 단박에 대선 지지율 1위로 올려놓았다. 서양 명의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의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간명한 아포리즘으로 2천400여 년 지나서도 회자된다. '역사는 길고 정치는 짧다.' '부패완판'의 법치 수호 슬로건으로 쏘아올린 정치 주사위 숫자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6으로 역사에 항성처럼 남을지, 1로 유성처럼 사라질지는 전적으로 그의 몫에 달렸다.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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