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힘든 것 없다더니…딸이 집에 오면 매일 자학했다

[학교폭력, 끝나지 않는 상처] 피해 아동의 또 다른 고통
학폭 피해자 수치심·모멸감 커…'SNS 퍼지면…' 공론화 못 해
부모들 피해사실 알기까지 6개월~1년정도 걸려

중학생 딸을 키우는 A(43) 씨는 지난해 딸 B양의 학교폭력 피해를 뒤늦게 알고 나서 억장이 무너졌다. B양은 평소 세 명의 친한 친구들에게 '은따(은근히 따돌림)'를 당하고 있던 것. 친구들은 B양을 제외시킨 온라인 채팅방을 만들어 험담을 시작했다. 그들은 온라인 채팅 프로필 상태 메시지에 B양 이름 이니셜을 적은 뒤 '꼴 보기 싫다'는 말을 남기거나 본인들끼리 동일한 프로필 사진을 해두는 등 노골적으로 B양을 따돌렸다.

A씨는 딸의 피해사실을 알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평소 딸이 티를 내거나 말을 하지 않은 탓에 특별한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딸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건 '학원 시간을 늦춰 달라'는 아이의 지속된 요청 때문이었다. 결국 A씨는 딸을 전학시킬 수밖에 없었다.

A씨는 "딸이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 오면 '힘든 게 없다'며 오히려 부모가 걱정할까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며 "지인의 아이의 경우 1년 간 집에 오면 매일 벽에다 머리를 박았다. 그럼에도 부모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부모가 동생을 추궁해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 학교폭력 피해로 자체로 의기소침·모멸감 느껴

A씨 딸의 행동은 학교폭력 피해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행동으로 꼽힌다. 자신들의 피해사실을 부모나 선생님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폭력 전문가와 피해 학부모들에 따르면 피해 학생들은 피해 사실을 어른들이 알게 된다는 것 자체에 걱정과 두려움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시교육청의 '2020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도 피해 미신고 이유에 대한 학생들의 응답 중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28.5%), '스스로 해결하려고'(23.8%),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18.6%)'의 이유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푸른나무재단 경북지부 관계자는 "아이들 판단으로 '해결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크게 하고 있다. 학폭 피해자는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로 의기소침해진다. 또 이러한 피해사실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모멸감을 느끼기에 주변 사람들이 몰라주길 바라고 있다"며 "학부모들의 경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 받은 사실을 공론화하길 바라지만 아이들은 정작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소문이 빨리 퍼지기 쉬운 온라인 환경 역시 피해 아이들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혹여나 가해학생이 본인의 왕따 사실을 퍼뜨려 많은 학생들이 알게 될까 두려움이 큰 것이다. 심지어 피해 학생이 전학을 가더라도 새로운 학교에 이미 피해 학생의 소식이 어느 정도 소문이 나 있기도 한다. 이런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 피해 학생들은 '오히려 신고를 안 하는 게 더 낫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피해 학생' 위하지 않는 학폭위

학교에 학교폭력을 조사하고 조치를 하는 기구인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이하 학폭위)마저 '피해 학생의 회복'에 동떨어져있어 도움을 요청을 하기가 쉽지 않다.

교사의 경우 피해 학생 측의 입장을 우선 고려하기엔 가해 학생 측 부모의 비난과 혹여나 인사평가 과정에 악영향을 받을까 우려해 학폭위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간혹 아이들 간의 갈등은 '성장과정의 일부'라며 학폭위를 빠르게 마무리 짓기 원하는 교사와 학교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대구지부의 한 사례에 따르면 한 피해 학생이 교사에게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털어놨지만 교사는 피해 학생에게 "저 친구 부모님이 이혼했으니 네가 좀 참고 용서해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 학생은 "부모가 이혼해 불쌍하다고 하는 친구에게 맞고 있는 나는 불쌍하지 않는가"라고 토로했다.

학부모들의 인식도 심각한 수준이다. 대부분 부모들은 내 아이에게 학폭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거나 '너는 연루되지 말고 모른다고만 해라'고 교육시키는 분위기가 큰 상황이다. 이는 학폭위가 열렸을 때 주변 친구들의 소극적인 진술, 가해학생을 보듬어 주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보니 결국 대부분 피해학생들은 학폭위 종료 후에도 마땅한 구제를 받지 못한 채 전학을 갈 수밖에 없게 된다.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8월까지 열린 111건의 학폭위 중 가해학생 처분 현황(1~9호·건수별 복수유형 포함)은 '접촉·협박·보복행위 금지(2호)'가 139건, '학교봉사(3·4호)' 79건, '서면사과(1호)' 78건 순으로 많았다.

한 학폭 피해 학생 부모 C(45) 씨는 "서면 사과나 접촉 금지 처분을 받아도 피해 아이를 보듬는 분위기는 전혀 없다. 가해자 역시 반성을 하지 않고 학폭위를 열었다는 사실로 피해자는 더 왕따가 된다. 결국 전학을 위해 지인을 동원해 주소를 빌릴 곳을 찾거나 아예 예체능 등 다른 계열의 학교를 찾아 본다"며 "학폭위에서 마땅한 피해구제를 받지 못하다보니 학교폭력신고를 경찰로 바로 해버리는 경우도 잦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해학생에게 학폭의 심각성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고 했다.

대구시교육청 관계자는 "가해 학생이 전학을 가야 한다는 데는 공감을 하지만 처벌 정도가 있기에 무조건 전학 조치는 어렵다"며 "학폭을 축소하거나 은폐할 경우 교사들에게 엄벌이 내려지는 만큼 교사들의 학교 폭력인지감수성 제고를 위해 꾸준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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