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 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27번째 이야기. 소호헌
조선은 왕의 나라인가? 신하의 나라인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개국부터 1910년 순종까지 조선은 27명의 왕이 이어받아 519년간 존속했다. 그 오백년의 시간은 왕의 시간이었을까, 대신의 시간이었을까, 혹은 백성의 시대였을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은 왕의 나라도, 신하의 나라도 아니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기반 아래 완비된 과거제도 등에 의해 선발된 엘리트들이 관리하는 통치 체제가 구축된 나라였다.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있었지만 고위관리인 내, 외직의 임명과 파직은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권한이었다. 이조는 오늘날의 총무처 그리고 인사혁신처의 역할을 다 갖고 있었다.
왕도 신하도 독단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절묘한 상호 권력 견제장치였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간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었고 조선시대는 당파싸움, 즉 당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파는 조선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의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그리고 '대북과 소북'으로 당파는 사안에 따라 분화돼나갔다.
당파싸움의 시작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한명회가 대표적인 훈구파의 거두라면 사림파는 훈구파에 의해 사화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조정에 진출한 선비들이었다.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화되고 대표적인 동인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즉 초야에 묻혀있던 선비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에 진출해서 사림파가 되었고 그들의 노선 차이가 다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서게 한 것이다.
안동은 동인의 태두인 퇴계학파의 본산이었다. 조선에서 주자학을 최초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가르친 이가 퇴계였다. 퇴계는 인간의 존재를 이(理와) 기(氣)로 구분하고 '이기이원론'을 폈다. 여기에 고봉 기대승은 반론을 폈고 율곡은 고봉의 주장을 이어받았다. 그것이 '이기일원론'이었다. 조선의 당쟁은 이처럼 주자학을 해석하는 예송논쟁과 '이기'를 둘러싼 해석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퇴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기 전의 사림이었지만 스스로 당쟁의 주역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인과 대립했고 그래서 조정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동인과 서인이 늘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계상(溪上)서당에 머물고 있던 퇴계를 만나기 위해 1558년 봄 안동에 찾아온 적도 있다. 58세의 퇴계와 약관 23세의 율곡의 세기적인 만남이었다.
퇴계의 수제자가 학봉 김성일(1538~1593)이듯, 안동은 그때부터 퇴계학파의 중심이었고 주자학의 본향이 되었다.

<강아지똥>의 동화작가 권정생 샘의 향기가 묻어나는 안동 일직에는 기념비적인 공간 하나가 있다. 대구에서 의성을 지나 안동 경계에 들어서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 일직이다. 일직면 소재지에 도달하기 전, 소호리 국도변에 오래된 고택 한 채가 고즈넉하게 있다. '소호헌'(蘇湖軒)이다.
안동에서 '소호헌'은 국가가 지정한 보물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소호헌'은 퇴계 문하가 아닌 율곡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약봉 서성의 태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향에서 서인 계열의 소호헌이 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던 사화를 밥 먹듯이 벌이는 적대적인 당쟁과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약봉 서성의 부친인 서해가 퇴계의 제자였다면,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 약봉이 율곡문하에서 공부함에 따라 서해, 서성 부자는 각각 퇴계와 율곡에게 사사받아 동인과 서인을 넘나들게 된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호헌은 조선전기 문신 서해(徐嶰 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을 지은 고성 이씨 집안의 이명(李洺)이 자신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가 결혼을 하게 되자 분가시키면서 지어준 집이었다. 그런데 대구 서 씨인 서해가 이고의 앞을 못보는 딸과 결혼하자, 선물로 이 소호헌을 내어준 것이다.
서해는 당대 안동 최고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대구 서씨 또한 서거정과 같은 가문으로 서해의 부친 서고(徐固)가 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당당한 명문가였다.
안타깝게도 서해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서해의 아내는 소호헌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서성(徐渻 1558~1631)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서 술과 약과를 만들어 팔면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이 소호헌 왼쪽 건물이 바로 약봉(藥峯) 서성의 태실이다.
약봉은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한양으로 올라가 율곡문하에서 공부를 한 덕에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성의 네 아들도 모두 입직해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첫째는 우의정에 올랐고 둘째는 종친부전첨, 셋쌔는 현감, 넷째는 선조의 사위가 됐다. 셋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안동 소호헌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소호리 태생 서성이 서울로 올라가서 집안을 크게 일으킨 셈이다.
지금의 소호헌은 대구 서씨 종중 소유로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소호헌에 도착한 때는 노을이 지기 직전이었다. 오백년이 더 지난 고택이었지만 관리가 잘 된 덕분인지 지금도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와서 낯선 손님을 맞이할 것 같았다. 소호헌 뒷뜰 목련은 봄 햇살을 받아 작열하듯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야흐로 봄의 절정이었다. 그 옆 작은 정원에 '소호헌 보물 제 47호'라고 장난스럽게 장식을 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호헌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 대청이다. 앞면 1칸, 옆면 2칸은 누마루가 놓여있다. 누마루에 붙은 대청은 'ㄱ'자로 꺾였는데 앞면 2칸 옆면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붙어 'T'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소호헌의 지붕 모서리를 장식한 기와에는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민가나 여염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용 문양이다. 누마루의 숫막새에는 봉황문양이 있다. 용과 봉황을 새겨넣은 기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사치를 부린 건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조선 후기에 일반 민가에서 용문양이 들어가 있는 기와를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아마도 역모의 죄를 범하였다며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했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집을 지은 이고가 99칸짜리 임청각을 짓는 등 민간에서는 최고의 집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소호헌을 지으면서도 나름 최고의 집을 꾸민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로서도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용과 봉황 문양을 기와 문양으로 쓴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건축을 실제 담당한 대목수의 실수가 아니라면, 용 문양을 쓸 수 있는 큰 인물이 이 가문에서 나기를 기대하는 보다 큰 뜻이 담겨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추해볼 수 있지만 근거는 없다.
'소호헌'에서 국도를 따라 6.5km정도 안동으로 가다가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구비도는 암산유원지 바로 옆에는 고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서원은 퇴계학파의 대학자로 인정받으며 '소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이 강학한 서원이다. 퇴계학파의 고산서원과 율곡 이이에게 사사받은 약봉의 소호헌이 지척 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당쟁의 격화라기 보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가 이곳에서도 소박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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