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양고살재(楊古殺岾)

'양고(楊古)'는 청나라 태종의 사위 양고리(楊古利)이고, '살재(殺岾)'는 양고리를 사살하고 피해 올라온 고개를 말한다. 청 태종이 병자년에 난(丙子胡亂)을 일으켜,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너, 영변 철옹성에 도착한 날이 12월 14일이다. 이날 인조(仁祖)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숭례문을 통하여 강화도로 향하였다. 최명길이 청 장군 마푸다(馬夫大)와 회담하는 동안 인조는 살곶이를 지나 송파루를 건너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인조의 입성 후 15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수난사였다.

청의 침략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다. 고창의 박의(朴義 1599~1653)는 1624년 무과에 급제, 말 잘 타고 활과 총과 포를 잘 쏘아 박 포사라 했다. 지방지원군으로 박의 부장은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을 따라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청군을 맞아 싸웠다. 산악을 이용, 거듭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게 되었다. 혹한에 눈이 휘몰아치자 사방이 밤같이 어두워졌다. 박의 부장은 어둠을 틈타 산 중턱에 몸을 숨기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적장이 선봉에서 아군의 후미를 파고드는 것을 보고 총을 겨누어 쓰러뜨렸다.

그가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로 만주 정황기(正黃旗)의 장수였다. 양고리는 창평(昌平)에서 명나라 군사와 쉰여덟(58)번 싸워 이겨 태종이 칭찬하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런 그가 예친왕과 더불어 조선에 왔다가 박 포사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것이다. 청 태종은 사위를 잃고 매우 애석하게 여겨 무훈왕(武勳王)으로 봉해 태묘에 앉혀 기렸다.

조정에서는 후에 어둠 속의 샛별 같은 박의에게 평안도 국방의 수장(守將)인 권관(權管)을 맡겼다. 나라가 위급함에 처했을 때 적의 요인인 청 태종의 사위를 쓰러뜨린 공을 세워 백성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박의 장군이 나서 자란 곳은 전북 고창 예지리 양정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조상에게 제사를 모시는 고인돌이 있는 곳이다. 유서 깊은 이곳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에 의해 닥나무 껍질로 한지를 떴던 아산 구암리, 천일염을 생산한 해리와 심원면과 가깝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소금장사 이야기도, 중국 사신단의 주 품목인 한지(창호지)도 구전에 의하면 고창에서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전주는 그 집산지일 뿐이다.

박의 장군은 양고리를 살상하고 당시 산맥을 따라 '양고살재'를 넘어 고향을 찾았다. 말년에는 권관의 직에서 물러나 예지리 양정에서 여생을 마쳤다. '양고살재'는 전라남도 장성과 전라북도 고창 사이의 영산기맥의 통로로 오늘도 많은 사람이 사연을 안고 넘나든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며, 인조 17년 삼전도에 태종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는 수모를 겪었다. 박 장군의 이야기는 중국 기록이지만, 배연(裵然)의 '포사전(砲士傳)'은 '적의 장군을 죽이고 그 부하를 무찔렀던 박 포사의 공은 병자호란에서 으뜸이다'고 적고 있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임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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