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이다. 1991년 10월 18일. 일본 땅 오키나와 나하의 한 집에서 결국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78세로 세상을 등진 배봉기(1914~1991) 할머니. 1943년 일제의 꾐에 속아 끌려가 위안부의 삶을 보내야만 했던 배 할머니는 1975년 스스로 위안부였던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했으나 세상은 침묵했다.
'속아서 일본군에 끌려와 모르는 나라에서 버려졌던' 배 할머니 죽음 이후 그해 12월 6일, 위안부 출신 김학순(1924~1997) 할머니 등 3명은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키나와에서는 배 할머니를 추모하고 기리는 49재가 열렸다.
물론 김 할머니 등의 소송은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일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과 한(恨) 맺힌 아픔을 풀어주기 위한 한·일 두 나라에서의 뭇 소송은 끝나지 않았고, 일본의 진정 어린 사죄와 조치가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게 됐다.
고인이 된 두 할머니 뒤를 이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세월 앞에 선 생존 위안부 열다섯 할머니의 투쟁의 삶은 여전하다. 특히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새로운 일에 나선 이용수 할머니도 그렇다. 법에 호소하는 위안부 할머니의 30년 투쟁은 이제 또 다른 시작을 한 셈이다.
이 할머니에게 올해는 남다르다. 지난 1993년부터 살았던 대구 달서구 39.6㎡(약 12평)의 좁은 임대 공간을 떠나 좀 더 넓은 수성구의 새로 마련된 보금자리로 이달 들어 이사를 했다. 이 할머니는 새집으로 옮긴 뒤 지난 7일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의 집들이 방문을 맞아 축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정 장관과 함께 대구 중구의 희움 일본군 위안부역사관을 찾아 자신의 희망을 밝혔다. 이 할머니는 평소처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장'으로서 '위안부 역사박물관 설립'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위한 정부 지원도 주문했다.
뒷세대 교육의 절실함은 이미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일본 법적 소송에 앞서 11월 18일의 일본 방송을 통해 호소한 일이다. 김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짓밟혀 비참하게 망가진 내 인생을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젊은 세대가 과거에 일본이 저질렀던 일을 알았으면 합니다"라며 이 할머니와 같은 생각을 드러냈다.
이제 생존 위안부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의 남은 시간도 고령과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점점 짧아지고 있다. 게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1932년 1월 일본 해군이 처음 만든 중국 상하이(上海)의 '다이살롱'(大一沙龍) 위안소도 도시재개발 계획으로 곧 사라질 위기라는 최근 외신도 있었다. 1945년까지 14년간 운영됐고 지금껏 한·중·일 여성에 대한 일제의 성노예 현장으로서 증언대 역할을 했으나 보존 조치가 없으면 영 사라질 판이다.
이런 즈음, 1928년생으로 올해 구순을 훌쩍 넘은 이용수 할머니가 나서 자라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고향 대구의 새 안식처로 집을 옮기고 정 장관과 희움 역사관에 들러 생전의 염원처럼 밝힌 이런 바람에는 그만큼 절박함이 배어 있다. 정부는 살아생전 꼭 이루고자 하는 이 할머니의 꿈 하나라도 현실이 되도록 나서길 바란다. 그리고 이 할머니, 부디 바라는 소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열네 분 할머니와 함께 건강하게 만수무강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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