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새끼손가락이 꽤 오랫동안 아팠다. 손톱 바로 아래에 있는 첫 번째 관절에 묘한 통증이 느껴졌다. 심하게 아프진 않아도 꽤 거슬릴 정도의 통증이었다. 그래도 선뜻 병원에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왼손잡이로 살고 있긴 하지만 왼손 새끼손가락의 존재는 참 애매하기 때문이었다. 존재감이 거의 없달까.
너무 하찮게 봤나. 갑자기 손가락이 눈에 띄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통증도 심해졌다. 통증 부위에 피부 변색까지 일어났다. 이쯤 되면 병원을 가야만 했다.
"관절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엑스레이에 초음파까지 동원하여 그 작고 작은 뼈마디를 들여다본 후 듣게 된 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에 차지 않았다. 좀 더 그럴싸한 병명이길 바랐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관절염이라는 말씀인가요?"
나는 의사에게 되물었다. 관절에 염증이니까 관절염 맞잖아?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관절에 염증이 생긴 겁니다."
의사의 대답에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일까. 관절에 염증이 생겼지만 관절염이 아니라니. 의학적 진단명과 나의 언어 구사 능력에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는 것 같았다.
의사와 더 대화를 나눌 의욕이 사라진 나는 힘없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물리치료 처방으로 뜨거운 파라핀에 왼손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면서, 아픈 건 손가락 하나인데 왜 손목까지 파라핀 용액 안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의사의 말을 차분하게 곱씹었다. 굳은 파라핀이 내 손을 다섯 겹쯤 감쌌을 때야 비로소 나는 진료실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내가 추리한 의사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이나리 씨의 손가락 관절에는 염증이 생겼어요. 이 염증은 만성적인 질환으로 분류되는 관절염과는 달리, 일시적인 염증 반응이므로 항생제를 먹고 물리치료를 받는다면 낫습니다. 만성 질환인 관절염과는 다르죠."
관절의 염증과 관절염의 차이. 의사의 언어 세계와 나의 언어 세계 사이에 발생한 간극은 이 정도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은 내용을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는 건 그 지루한 물리치료 시간을 재미있게 만든 유일한 유흥이었다.
'이게 글 쓰는 일의 본질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절의 염증과 관절염 사이에 개연성을 갖춘 서사를 부여하는 일.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염증 덩어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다. 더 그럴싸해 보이도록 빈칸을 채우는 과정은 무척 재미있다. 재미야말로 내 직업을 지탱하는 가장 큰 동력 아닐까.
손가락의 염증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불룩하게 솟아있는 상태이다. 생략법이 많이 적용된 문진 방식 때문에 해당 병원의 재방문을 망설이고 있다는 점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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