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간단치 않은 일이다. 시는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를 다루며, 또한 목적과 가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중년의 한국인들에게 시란 그다지 낯선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년의 기억은 시에 대한 기억과 맞닿아 있으므로. 한 달에 한 번 쯤 아버지들은 이발소 의자에 앉아, 꿈같던 하지만 짧았던 호사를 누리시곤 했었다. 삶에 지쳐가던 아버지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른바 이발소 그림과 이발소 시. 아버지들은 이발소 의자 위에서 족히 수천 번은 읽고 또 읽었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싯귀에 더할 나위없는 위로를 얻었으리라. 물론 이발사 아저씨가 건넨 알사탕의 달콤함에 넋이 나갔던 꼬마의 어린 눈망울 속에도 그 시는 날아와 꽂혔으리라. 뽀글머리 파마 전문 미장원 거울 위에도 어김없이 걸려있던 그 싯귀는, 너덜너덜해졌던 어머니들의 마음도 어루만져 주곤 했다. 삶에 속임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던 시기, 우리들 삶의 흔한 풍경이었다.
유배지에서 7년을 보낸 뒤 낙담하던 26세의 젊은이에 의해 1825년 쓰여졌던 시가, 100여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날아와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러시아인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이 시는,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우리 한국인들에게 과한 사랑을 받았었다. 우리의 삶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시와 깊게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1천년에 달하는 러시아시의 역사를, 외국인 연구자의 눈으로 집대성 한 책이 바로 에블린 브리스톨(Evelyn Bristol) 교수의 "러시아 시의 역사(A History of Russian Poetry, 1991)"다. 브리스톨 교수는 푸시킨과 그의 시대를 황금기라고 부르며 러시아 시의 역사상 최고의 시기로 칭하고 있다. 경북대학교 도서관에는 일리노이 대학 슬라브학과에서 40여년간 재직했던 브리스톨 교수가 평생 모아온 러시아문학 관련 희귀도서 930여권이 브리스톨 문고라는 이름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자신의 책들이 진정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소중하게 남아있기를 바랐던 브리스톨 교수는, 은퇴를 하면서 자신의 모든 책들을 일리노이 대학 도서관이 아닌 한국인 제자에게 남겼고, 그 한국인 제자와 필자의 인연으로 이 책들은 고스란히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특히 1920년대와 30년대 수많은 문학적 실험들이 폭발했던 모더니즘 시기에 대한 희귀연구서들은 외국의 유수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2004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삶'은 한국인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5천888개 중 189번째에 자리잡고 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삶'을 주격조사 '이'와 결합시켜 보았더니 자동 생성되는 문구의 첫 번째 자리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뜬다. 보조사 '은'과 연결시켜 보았더니 그 첫 번째 자리에는 '삶은 계란 칼로리'가 뜬다. 지난 100여년간 낯선 러시아 싯귀에 위로받았던 한국인들이 힘들게 힘들게 건너왔던 거리는 아마도 이들 두 문구 사이의 거리만큼 될 듯 하다.
김정일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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