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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대충의 비밀

이수영 책방
이수영 책방 '하고' 대표

필자가 일하는 곳 주변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사신다. 대부분 이 동네에서 기본 30~40년 사신 분들이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어르신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적응이 좀 필요했지만 몇 해 지나다보니 이제는 서로 안보이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이가 되었다.

어르신들 중에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각 분야의 고수들이 곳곳에 숨어 계신다. 특히 정원 가꾸기의 고수들이 많은데 너른 마당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만의 정원을 '생성'하신다. 까만 고무다라이도, 스티로폼도 모두 정원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상추, 고추, 쑥갓, 가지, 방울토마토 등 다양한 작물을 심어 잘 키워내신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면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필자의 로망이 무색하게 그 어디서든 식물을 재배하고, 게다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는다. 상추 키우기의 달인인 옆집 할아버지께 잘 키우는 비결을 물어보면 "그냥 심으면 자란다"고 하신다.

앞집 할머니는 야생화와 블루베리를 잘 키우시는데 필자도 할머니를 따라 몇 해 전 블루베리 묘목을 샀다. 블루베리를 따먹을 상상을 하며 화분을 애지중지, 바람도 쐬어주고 햇볕도 쬐어주고 영양제도 사서 뿌려주고 겨울에는 추울까 실내에 들여놓는 등 심혈을 기울였건만 열매를 보지 못했다.

블루베리가 가득 달린 할머니의 화분을 부러워하니 할머니께서는 오며가며 따먹으라고 하셨다. 할머니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키울 수 있는지 여쭤보면 "대충 두면 알아서 큰다"고 하신다.

건너건너 집 할머니는 김치 겉절이 고수이신데 가끔 나누어 주시는 겉절이가 어찌나 맛있는지 양념의 비결을 물어보면 "대충 알아서 넣으면 된다"라고, 뚝딱뚝딱 수리의 고수 철물점 할아버지께 기술의 비결을 물어보면 "그냥 하다보면 된다"라고, 옆 재래시장에 3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킨 장사의 고수 분들께 오래 하는 비결을 물어보면 역시나 "하다보면 그냥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요약해 보자면 고수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비결의 대부분은 '대충'하거나 '그냥' 하면 된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숱하게 읽어온 자기개발서에서 가장 금기시해온 그 단어가 아닌가!

어르신들께서 가르쳐준 그 비결을 따라 대충 상추를 키웠다가 다 말라 죽었고, 대충 해본 겉절이는 식구들 그 누구도 먹지 않았다. 철물점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냥 하면 된다 했던 집수리를 시작했다가 며칠을 앓아 누웠고, 자영업 역시 그냥 대충 하다간 30년은커녕 1년도 못 버틸 것 같다. 작년 여름에 열매 맺지 못한 블루베리 화분은 앞집 할머니의 조언대로 대충 밖에 던져뒀다가 결국 얼어 죽었다.

'대충'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아마도 오랜 세월을 거친 땀과 눈물, 슬픔과 기쁨의 경험들이 녹아있어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막막할 때, '그저 대충'이라고 말씀하신 건 아닐까. 굳이 동양철학을 들먹이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상태나 정도'인 중용(中庸)을 가장 쉬운 언어로 알려주신 것 아닐까.

이제서야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대충'의 의미를 '대충'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대충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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