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문선의민(文宣衣民)

'문선(文宣)'은 문씨가 베픔이고, '의민(衣民)'은 백성이 옷을 입음이다. 즉 문씨가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이 무명옷을 입었다는 뜻이다. 사람 사는 의(衣)·식(食)·주(住) 중에 무명옷을 입게 한 문익점(文益漸1329~1398)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하고 1363년 순유박사(諄諭博士)가 된 뒤 서장관(書壯官)으로 좌시중 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원(元)나라에 갔다.

고려는 원과 여섯 차례나 싸웠으나 져, 충열왕부터 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를 거쳐 공민왕까지 7대 80년간 자주성을 잃고, 부마국으로 원 공주 8명이 왕비(正妃)가 되고 세자를 인질 잡혔다. 원은 봉작(封爵)인 심양왕(瀋陽王)제도로 고려를 조정했는데, 충선왕의 셋째 덕흥군(德興君)을 앞세워 최유(崔濡)일파가 공민 왕을 밀어내려고 1만 원군으로 요동을 공격했으나, 1364년 1월 최영과 이성계가 의주에서 막았다.

원 왕은 삼우당에게 덕흥군을 따르라 명했으나 듣지 않자 교지(交趾)를 내려 하노이 북쪽에 3년간 유배했다. 삼우당은 귀국할 때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노파의 제지에도 따서 몇 개를 붓 뚜껑 속에 넣었다. 원에서 귀국하자 조정에서는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파직했다. 뭇 백성들이 칡 섬유 갈포(葛布)와 삼베(麻布)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씨를 시험재배 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목화재배에 성공하자 10여년 만에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알지 못했다. 마침 정천익 집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해 '문선의민'했다. 그간 수입에만 의존하던 목면과 솜옷을 일반 백성들도 입게 되었다고 '한국인물사전'에 전한다.

면화의 생산은 의료(衣料)계의 대혁명으로, 나라경제에도 크게 공헌했다. 의생활 개선이 한창일 무렵, 1361년 10월 홍건적이 원의 공격으로 퇴로가 막히자 20여만이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은 수도 개경을 비우는 공성계(空城計)로 사태를 피하고, 1362년 1월 최영과 이성계가 허를 찔러 10여만을 사살함으로 물리쳤다. 공민왕이 승하하자 우왕이 즉위하고, 삼우당은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으며,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에게 강론을 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병을 핑계로 가담하지 않았다. 덕흥군 때를 교훈 삼았지만, 역사의 추는 이성계 편으로 기울어 이준(李逡) 등이 전제개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탄핵돼 관직에서 물러났다. 삼우당은 낙향해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사적 108호로 지정된 목화 재배지에서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황(李滉), 송시열(宋時烈), 이이(李珥) 등 여러 사람이 삼우당을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

옛적에 신농이 백성들에게 논밭 갈기를 가르쳤고 神農敎民耕

후직이 백성들에게 논에 모심기를 가르쳤는데 后稷敎民稼

문 충선공은 백성들에게 무명옷을 입혀 주었으니 忠宣衣我民

그 충성한 공은 옛적의 그것보다 갑절이나 되도다. 豊功倍前昔

세종 22년에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임종대
임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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