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기준생성(基準生成)
1973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B형 간염 바이러스 항원을 혈청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B형 간염 백신 개발국이란 타이틀을 갖게 됐으며, 국내 만성 간질환 유병률을 5%까지 떨어뜨리는 변곡점을 맞게 된다.
개발자는 김정룡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다. 평생을 간질환 연구에 매달리다 5년 전 별세했다.
김 교수가 남긴 말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하고 실용화하기까지 6년이 걸렸는데, 이 기간 동안 두고두고 각성해야 할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백신 개발에 성공한 김 교수는 곧바로 생산을 계획했다. 하지만 우리 보건법에는 세계 최초 백신에 대한 인증 기준이 없었다. 김 교수는 독일로 건너가 인증을 받아야 했고, 독일은 인증과 동시에 상용화해서 세계 첫 B형 간염 백신을 만드는 나라가 됐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자본을 투자한 미국까지 끼어들어 B형 간염 백신을 생산해 내는 세계 2번째 국가가 됐다.
3번째 상용화 국가가 된 우리나라는 '블루오션'인 간질환 치유제 시장을 창출해 내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레드오션' 시장에 가까스로 동참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문제는 새로운 변화에 대비할 기준 부재였다.
최진석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는 "기준 설립은 국가 명운과 직결된다"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남의 기준을 빌리거나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준에 의존해 모방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전쟁 이후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낼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현재 수준 능가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모방국으로서 '소득 3만 달러 시대'는 이미 최고 경지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하락세만 남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기준의 문제를 근래 최대 관심사인 주택 문제에 대입해 보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는 규제 일변도의 정책으로 선회했다.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수십 번의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면서 규제 기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집값은 오르고 시장은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민심은 4월 재·보궐선거를 통해 폭발했다. 놀란 정부는 종부세 완화를 검토하고 나서는 등 규제 완화로 급변하는 분위기다. 3년 동안 진행된 과정에서 '공급-수요 곡선'을 초월하는 새로운 기준 도입은 없었을 뿐 아니라, 모방한 기준들마저도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 있다.
혼란 속에 정부 정책 신뢰도는 더욱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유동성 자금이 부동산으로 계속 쏠릴지, 암호화폐와 주식 투기로 확산할지도 예측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근로소득'보다는 한탕주의에 따른 부작용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만은 모두가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기준을 생성할 능력이 없다면, 최소한 귀를 크게 열어두고 경청하며 배우는 자세라도 취해야 한다. 범국민적 동의에 따른 함의를 모아간다면 우리의 남아 있는 저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적폐 청산'이란 단어를 역사 속에 묻어야 한다. 특정 계층이나 지지자만의 동력으로는 국가 경제를 지탱해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적폐를 청산하면서 칼자루 쥔 인사들은 신(新)적폐화됐고, 소모적 정책을 거듭하면서 파탄 난 경제는 후대로 이어지는 수치스러운 유산이 됐다. 문제 해결을 위해 보수와 진보, 여야가 따로일 수 없다는 의지를, 얼마 남지 않은 임기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 신기준 생성의 토대로 삼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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