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감당의 입맛을 다시게 하는 사탕제품(칸듸)이 요즘 대구에 대량 입하 중에 있다.~ 본 제품은 먼 곳인 미국에서 온 것인데 경북의 총 할당량 22화차, 총 중량 660톤이 인천으로부터 지정장소 대구와 김천을 향하여 수송 중에 있다고 하는데~ 근근 일반에게 배당이 실현된다면 달콤한 맛에 감당을 즐겁게 할 것이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9월 24일 자)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26일 대구경찰서장인 유철을 서울역에서 체포했다. 유철은 정식으로 발령을 받지 않았지만 대구서장으로 행세해 왔고, 이날은 해방자호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는 해방 직전 함경도에서 일본 헌병을 지낸 행적이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유철은 이미 세간에 캔디서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배급받은 캔디를 몰래 빼돌려 팔다가 체포된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던 터였다.
이처럼 경찰서장에게 뇌물을 주고 불법 유통을 할 정도로 과자 판매는 짭짤한 이익을 남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찾는 사람보다 공급이 부족했다.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절에 당분 섭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부족한 당분을 캔디로 보충하려 했다. 미국에서 배급물자로 들어오는 캔디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군정당국은 지역별로 사탕과자인 캔디를 배분했다. 1946년 9월의 경우 경북도에는 22개 화차분량이 할당되었다. 달콤한 맛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절절함이 기사에도 묻어난다.
해방은 일상의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에는 남한에 진주하기 시작한 미군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었다. 카바레 같은 유흥문화나 음식문화도 그중의 하나였다. 미군들은 길거리에서 캔디 같은 과자를 먹는 군것질이 예사였다. 길거리에 다니며 음식 먹는 것을 터부시했던 시민들도 차츰 이 같은 군것질 문화에 익숙해졌다. 이러다 보니 길거리에 과자를 파는 상점과 과자 맛에 빠지는 시민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렇다고 먹고 싶을 때 손쉽게 과자를 사먹을 수는 없었다.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소값이 떨어져도 소고기값은 그대로였듯 설탕값이 내려도 과자값은 요지부동이었다. 1948년 봄에는 설탕값이 3분의1 가격으로 폭락했지만 과자값은 끄떡없었다. 시민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업자들의 이익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고급 떡으로 알려진 케이크는 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사먹지 못하니 훔쳐서라도 먹으려는 사람이 더러 생겼다. 교도소에는 정치범이 사라진 대신에 미군의 담배나 과자를 훔친 절도범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과자는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더없는 인기 상품이었다. 당국은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줬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사탕을 녹여 비스킷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기념일이 아니면 보통의 아이들은 과자를 맛보기가 쉽지 않았다. 끼니를 굶는 아이들에게 과자는 사치품에 가까웠다. 집에서 돈을 훔쳐 과자를 사먹다가 붙잡힌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만했다. 이러다 보니 특별한 날에는 으레 과자 선물이 따랐다. 시간이 흘러 여러 종류의 과자를 섞은 종합선물세트도 등장했다.
역병이 여전한 올해도 어김없이 어린이날이 온다. 사라졌던 어린이용 과자 선물세트가 어느새 부활했다. 과자 선물세트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그때처럼 많아진 걸까.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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