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 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30번째,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안동에 빠지다
2020년 9월 '태평초'를 먹으면서 시작된 '안동을 걷다, 먹다'가 어느 새 5개월이 지났다. 쉼 없이 안동을 걷고, 달리고 먹었다.
첫 눈이 내린 어느 날 '안동역'은 안동시외버스터미널 옆으로 이전했고 가수 진성의 '안동역 앞에서'의 무대는 다시는 기차가 오지 않는 쓸쓸한 장소로 전락했다.
안동역 인근에 있던 헌 책방 '오로지 책 마리서사'는 문을 닫고 '책 마을'로 숨어들었다. 오랜 코로나 사태의 여파다.
'비밀의 숲'으로 불리며 연인들의 비밀스런 데이트장소로 각광을 받던 '낙강물길공원'은 황량한 겨울 풍경에서 벗어나 봄이 오자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봄꽃과 더불어 안동은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가을과 겨울을 이겨낸 안동은 봄이 되자 생동감 있는 색깔을 띠기 시작한다.
안동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고 내 귀도 안동의 소리를 알아 챌 정도로 트이기 시작했다. '어디 가니껴? 아침 자셨니껴?'라는 안동 사투리도 익숙하게 들려왔다.
안동을 걷고 안동을 먹는다는 것은, 안동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내는 즐거운 작업이었다. 안동 사람의 삶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되짚어내는 것은 안동국시와 안동 간고등어, 혹은 안동찜닭을 일상적으로 먹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안동 맛집 탐방이나 미식 기행이 아니었다. 이제야 안동으로 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던 길을 발견한 것이다.
퇴계의 정신과 퇴계의 향기를 맡았지만 여전히 퇴계의 사랑은 문외한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가 남긴 학문이 아니라 그의 삶의 자취는 안동 어디에서나 향수처럼 흐르고 있다. 퇴계의 향기는 도산서원과 계상서당, 노송정 종택, 퇴계종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퇴계의 삶의 자취를 쫓다 보면 우리는 어느 새 '이육사'를 만나게 되고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과 석주 이상룡을 만난다.
안동은 그저 한적한 시골 도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람의 본거지와도 같다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상상한,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양반 도시가 아니다. 100여 곳의 종택과 뼈대 있는 성씨(姓氏)의 본향이라는 사실이 안동을 그런 고착된 이미지에 가뒀다.
지금껏 하나하나 확인해 온 안동의 진면목은 안동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아직까지 안동의 매력에 홀리지 않거나 안동에 달려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동을 제대로 여행하는 법
안동은 어떻게 여행하고 즐기는 것이 좋을까? 특별한 여행법이나 정형화된 안동 여행의 정석은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안동을 다니면서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보고 느끼고 먹는 것보다 나은 여행은 없다.
그러나 안동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이자 세계문화유산 등 뛰어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아름다운 관광 명소들이 즐비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몇 가지 Tip 정도는 미리 챙겨보자.
우선 안동은 생각보다 넓다. 그래서 안동에 도착할 때는 KTX나 고속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보는 데는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쏘카'같은 공유 차량과 알파카 같은 공유 킥보드 등도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데 편리하다.
첫 번째로 특별한 일정을 짜지 않고 편하게 다니는 '감성여행'을 계획한다면 그냥 안동에 오면 된다. 쓸쓸한 안동역에 가서 진성의 노래비를 보고 길 건너 노래방을 찾아 '안동역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그리고는 안동댐 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낙강물길공원'이다. 봄바람 완연한 봄날 햇살좋은 오전 공원 벤치에 양산을 받쳐 놓고 피크닉 도시락 펼쳐 놓고 비밀의 숲 속 풍경으로 빠져드는 것은 어떨까? 그저 한나절 멍 때리기 좋은 계절이다.
배가 출출해질 때쯤에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안동국시와 안동갈비 등 안동의 시그니처 음식들도 지척지간에 있다.
낙강물길공원에서 물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월영교'에 닿는다. 월영교는 석양 즈음에 보거나 햇살 좋을 한낮이나, 어스름 저녁 야경이 시작되는 즈음에나 다 좋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조선시대 어린 아내의 절절한 사랑을 떠올려보면서 우리 시대의 사랑을 비교하지는 말지어다.
저녁에는 호텔보다는 안동 시내 도처에 산재한 종택과 고택을 골라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어떤가. '고택스테이'를 사전 예약한다면 시골집에 가더라도 체험할 수 없는 한옥의 아름다움과 고즈넉함에 빠져보자. '오류헌'같은 고택도 좋고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이나 '학봉종택' 같은 유서 깊은 한옥스테이 중에서 고르는 맛도 있다.
하루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드라마의 여운을 맛보는 안동을 즐기시길 바란다.
청송 가는 방향으로 40여분 가면 만휴정을 만나게 된다. 안동은 '정자와 누각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처에 이름만 정자가 있다. 만휴정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기념비적인 장면이 각인된 장소다. '인생샷' 찍기에 좋다. 이 드라마에 나온 다른 안동의 정자는 '고산정'이다. 고산정은 만휴정에서 봉화 방향으로 40여분 가야 한다.
봄날의 정취를 제대로 맛보는 안동 여행을 계획한다면 서안동 IC에서 풍산읍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있는 '체화정'을 한 번 둘러보시라. 조선 중기 선비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정자가.
대구에서 안동으로 온다면 의성과 안동 경계에 있는 '소호헌'을 추천한다. 퇴계학파의 본향인 안동에 율곡 이이 문하에서 공부한 약봉 서성 선생의 태실이 '소호헌'이다. 탕평은 안동에서 이뤄진 셈이다.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하는 데에는 퇴계의 향기가 오롯이 꺼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퇴계의 향기를 쫓는 여정을 짜보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라 꼭 한 번은 가보시길 바란다.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서 보고 느끼면 된다. 퇴계를 모신 도산서당에 먼저 갔다가 거기서 멀지 않은 도산면 소재지로 가면, '노송정 종택'과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의 묘가 있다. 자녀들이 있다면 꼭 한 번 가보시라. 퇴계가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라지만 퇴계를 키운 것은 모친 춘천 박 씨였다. 퇴계의 어머니는 어떻게 퇴계를 키웠을까? 글을 배운 적이 없어 글을 모르는 춘천 박 씨였다.
군자마을은 조선시대 건축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오히려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보다도 더 감탄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선비순례길
오로지 세계문화유산만 보는 여행이라면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그리고 봉정사와 한국국학진흥원, 하회마을을 묶자. 이들 안동에 소재한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들이 왜 등재된 것인지 미리 살짝 공부하고 온다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하회마을에 가서 전동차 호객 따위는 무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하겠다면 그리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안동은 아주 오래된 도시다. 중국의 고도와는 다르지만 옛 안동역 건너편 산비탈 마을 신세동에서는 7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 마을을 벽화마을로 꾸며놓아서인지 꽤나 이색적이다. 통영과 부산 같은 삐까번쩍한 벽화마을과 규모는 달라도 나름 꽤나 '안동스러운' 마을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안동여행이라면 <강아지똥>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추억을 따라 가는 여정도 반드시 넣어보자. 여기에 퇴계의 후손인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그의 삶과 저항시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안동음식은 다양하다
'경상도 음식이 맛이 없다'는 선입견은 버리는 것이 좋다. 안동에서는 하루 이틀만에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안동이라는 지리적 표시를 단 시그니처 음식이 많다. 누구나 좋아하는 안동갈비와 안동국시 그리고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는 안동에 와서 먹어야 제맛이 난다.
누룩향이 강한 안동소주도 변신을 거듭했다. 아예 도수 20도 이하짜리 안동소주도 요즘은 마실 수 있다. 안동신시장에 가면 안동문어가 지천에 깔려있고 고등어를 직접 가공해서 저렴하게 파는 간고등어 가게들도 골목을 이루고 있다.
안동의 주요 먹자골목은 옥동에 몰려있지만 옛 중심지에는 '맘모스제과'가 포진하고 있는가 하면 채썬 단무지로 시원하게 고명 올려 맛을 낸 냉우동도 있고 시내 어디에서나 안동 간고등어 굽는 냄새, 안동찜닭, 헛제사밥 식당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안동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숨어있는 보석같은 <고향묵집>같은 식당도 찾아보길 바란다.
안동시청 인근 길모퉁이에는 '존 하테치아'라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퓨전 밥집도 궁금하다. 고등어가 보이지 않는, '고등어 루꼴라 비빔밥'이 이색적인 밥집이다.
'안동역에서'를 부른 가수 '진성'과 이름이 같은 '진성식당'은 안동 최고의 돈까스 맛집으로 통한다. 코로나 시절인 요즘도 점심때는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안동이 주산지인 참마로 만든 칼국수 맛집도 있고 족발을 잘해서 TV프로그램에 소개된 식당도 있다.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입이 즐거워야 했을 것이다. 종갓집마다 집안 특유의 음식이 있고 그것들이 은연중에 안동의 맛을 만든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제수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 문어와 찜닭과 간고등어, 안동국시가 안동의 시그니처 음식이 된 바탕이 종가의 제례였을 것이다.
자, 이제 안동으로 떠나기만 하면 된다. 6월이면 서울에서 안동까지 KTX는 1시간 30분으로 단축된다. 안동은 멀리 있지 않다. 퇴계의 향기는 우리 삶의 향기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불과 한나절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지금까지 '안동을 걷다, 먹다'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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