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후 서울 시민들을 향해 '수도 사수'를 장담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3일째 되던 날 한강 인도교와 철교 3곳을 폭파했다. 이 대통령이 일찌감치 서울을 빠져나간 사실을 안 시민들은 깊은 배신감을 곱씹었다. 이 대통령은 국외로 망명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땠는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그는 "언제라도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는 이 땅에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나와서는 안 된다"며 정권을 잡았다. 1969년의 3선 개헌도 '절대로' 개헌하지 않겠다던 과거의 약속을 뒤집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권력을 연장하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결국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전두환 장군도 1979년 12·12 군사 반란 이후 "군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몇 차례나 다짐했다. 전 장군 역시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군대 무리를 이끌고 정권을 낚아챘다. 그는 퇴임 후 내란 및 군사 반란죄로 무기징역형과 추징금 2천200억 원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이 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던 자신의 선거 공약을 파기해 버렸다. 그도 불법 비자금과 내란죄로 징역 12년과 추징금 2천838억 원을 선고받았다.
'문민정부'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보자.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쌀 수입은 대통령이 되면 직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집권 첫해인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의 국제적 압력 때문에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며 대국민 약속을 뒤집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야당 지도자 시절인 1986년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면 사면 복권되어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당시 여권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하자, 1987년 대선에 출마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선 패배 후 정계를 떠난다고 선언하며 영국으로 망명객처럼 떠났지만 1997년 대선에 다시 도전했다.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본인들의 공로에도 자식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수감되는 통에 명예롭게 퇴임하지 못했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국민 약속을 다수 뭉갰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록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앞선다. 집무실을 정부종합청사로 옮겨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지만 1년도 안 돼 포기 선언을 해 버렸다.
문 대통령의 허언(虛言) 가운데 압권은 부동산 대책이다. 수도권 집값이 폭등하자 올해 신년 기자회견장은 물론 공식 석상에서 '집값 잡는 데 자신 있다. 정부를 믿고 따라 달라'고 누누이 공언했다. 결과는 어땠나. 문 대통령 말만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의 분노는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 확보에서도 문 정부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오는 11월까지 집단면역을 완성시키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접종률에서 전 세계 100위권 밖이고 백신 유입은 늦잡쳐지고 있다.
문 정부가 가장 잘하고 있는 것은 조국·추미애·윤미향·박원순 사태에서 보듯 '자기편 잘못은 괜찮은 것이어서 어떤 경우라도 감싸야 하고, 상대방의 경우는 가차 없는 비판과 함께 타격을 입히는 간계(奸計)'다.
임기 말로 접어든 문 대통령은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소속 당적을 버려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 국민과 당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면 나라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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