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 산기슭에 나무들은 높고 낮고 墟煙暗淡樹高低(허연암담수고저)
풀들이 길을 덮어 내 갈 길이 헷갈리네 草沒人蹤路欲迷(초몰인종로욕미)
그대 집 코앞에서도 그대 집을 못 찾는데 行近君家猶未識(행근군가유미식)
밭 늙은이 등 뒤로 다리 서쪽 가리키네 田翁背指小橋西(전옹배지소교서)
*원제: 訪金益之(방김익지: 김익지를 찾아감)
유라시아 대륙을 주름 잡던 그 거대한 원(元)나라가 돌연 와장창 서산에 지고, 동해에 솟구치는 찬란한 태양처럼 명(明)나라가 불끈 솟아오를 때다. 서른네 살의 푸른 피가 펄펄 뛰는 나이였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전남 나주를 향해 터덜터덜 유배길에 오르고 있었다.
지는 태양보다는 떠오르는 태양을 가까이하는 것이 국익에 유리하다는, 당연해도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을 편 것이 유배를 가야 하는 사유였다. 그러므로 그는 2년 남짓 동안 볼멘 표정을 지으면서, 참 할 말이 많은 유배살이를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난데없는 땅에 갑자기 툭 떨어진 그는 무엇보다도 몹시 외롭고 쓸쓸했다. 그러므로 그는 더러 승려나 숨어사는 은사들을 찾아다니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곤 했다. 그런 흔적들이 그 무렵에 지은 한시에도 여기저기 남아 있는데, 위의 시도 바로 그런 경우다.
보다시피 그는 지금 김익지란 사람을 찾아가고 있는데, 산기슭에 안개가 자욱하여 마치 꿈길 속을 걷는 것 같다. 바로 그 몽환적인 안개 속에서 높은 나무는 높이 우뚝 서 있고, 낮은 나무는 낮게 서 있다. 게다가 이미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가는 길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 당시 삼봉의 그 막막했던 인생길을 작품 속의 산길이 대신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에도 두어 번 와본 적이 있었던 김익지의 집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막상 어딘지 찾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늙은 농부에게 물어본다.
"보이소, 어르신, 김익지의 집에 갈라 카머 어디로 가야 되능기요?"
늙은이는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등 뒤로 말없이 작은 다리 서쪽을 가리킨다. 한 폭의 산수화가 완성되는 찰나다. 10호 크기로 잘 표구해서 호연정(浩然亭) 대청에다 걸어둬야겠다.

이종문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댓글 많은 뉴스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