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다시, 사투리] ③사투리와 사람들-5. 사투리 그림, 김성우 관장

“정겨운 사투리 그림 그리며 농사의 고달픔 잊지요”

김성우 관장은 사투리로 그린 그림들은 삶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어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성우 관장은 사투리로 그린 그림들은 삶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어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했다.

◆3.사투리와 사람들

5. 사투리 그림, 김성우 관장

전라남도 강진군에 자리한 와보랑께 박물관. 이곳에는 오래된 생활용품과 책 그리고 사투리로 된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사투리 그림 앞에는 관람객들이 오래 서 있다. 그림 속에 '해보랑께' '워쩌까' '아따 거시기'등 생활 속 사투리들이 보일 듯 말 듯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사투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김성우관장(75). 그는 전라도, 제주도, 경상도 사투리로 된 그림을 그리느라 농사의 고달픔을 잊은 채 밤 세워 작업하고 있다. 주변에서 '정말 재미있고 신선하다'는 반응에 신바람이 나서.

-그림 속 사투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글자가 보이면 재미없지요.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하면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중간지점을 찾는 것이 아주 어렵지만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떤 이들은 너무 생소하다며 어이없어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에게 그림 속 사투리를 설명하고 알려 줄 때면 마냥 신이 납니다. 그림이 선, 색, 명암, 형태등으로 자기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사투리를 추가해 나만의 감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글자만 있는 캘리그라피와는 다르지요.

-사투리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2010년 경 글씨로 된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봅니다(웃음). 글씨로 된 그림을 그리다보니 주변에서 오래된 물건을 전시하는 박물관 운영자답게 이왕이면 사투리로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역사와 삶이 담긴 사투리로 그림을 그리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지요.

-작업 과정을 짧게 소개해주십시오.

▶일단 쓰고자하는 글자를 정한다음 글씨 형태를 생각합니다. 글자가 너무 적나라하면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자쓰기이지요. 조형미도 갖춰야하고 색감도 서로 어우러져야합니다. 글자를 찾는 묘미도 있어야하고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김성우 관장은 사투리로 그린 그림들은 삶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어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성우 관장은 사투리로 그린 그림들은 삶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어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림 안에 있는 사투리들이 자주 사용되는 생활사투리여서 더 정겹습니다.

▶사투리를 대하다보면 지난 사람들의 모습과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특히 사투리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많이 사용하고 강도도 높습니다. 그만큼 여성들의 삶이 고달팠기 때문이겠지요. 사투리 속에는 삶의 무게와 상처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습니다.

-조금 난처한 질문이지만 사투리 그림이 팔리기도 합니까

▶일 년에 몇 점씩 팔립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왜 사는 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기분은 아주 좋습니다(웃음). 오늘도 한 점 구입한 분이 있었습니다. 고마울 뿐입니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셨습니까

▶저는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습니다. 그림을 정식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그림지도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저 고달픈 삶에 위안이 되기에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스케치북과 연필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습니다. 배고파서 거지들과 함께 생활 할 때도 스케치북만큼은 들고 다녔습니다.

-독학으로 연습한 것이군요

▶죽도록 괴로울 때, 배고플 때, 그림은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었고 위안이었고 괴로움을 달래주는 도구였습니다.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와보랑께 박물관
와보랑께 박물관

-어떤 삶인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학교선생님을 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행상 노점등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제주와 부산에서 공장도 다니고 날품팔이도 하면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부산에서 전기와 관련된 일을 하며 가정을 꾸렸으나 그것도 힘들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요. 그 후 친척분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서 서무 일을 20년 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근무하며 컴퓨터도 배워 박물관 홈페이지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1983년 광주에서 첫 전시회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엄두도 못 냈지요. 장판에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문짝을 맞추는 가구점에서 액자를 만들어 전시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방명록에 있는 격려의 말씀들이 그림을 계속 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지요. 전시회를 하고나니 너무 허무해 1991년에 1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틈틈이 그려온 것들을 모아 책(소묘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을 짓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오래된 물건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서 주워 모았습니다. 그것이 많아지자 소문이 나면서 기증하시는 분들이 생겨 생활박물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에 정식으로 사설 박물관을 오픈했지요. '와보랑께'는 아내가 지어준 박물관 이름입니다. 지역사투리로 박물관 이름을 지으면서 사투리와 인연이 시작된 듯합니다.

-박물관 운영이 힘들지는 않은가요

▶1년에 약 3천명의 관람객이 찾아옵니다. 체험하러 오는 학생들도 있고요. 최근에 아들이 아버지의 박물관을 물려받겠다며 학예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래서 든든하고 좋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까

▶당연하지요. 제대로 그림을 배워서 그림만 그렸더라면 지금보다 더 잘 살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나이를 먹어보니 인생의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이 있을 뿐이지요. 매일을 열심히 살면 그게 답 아니겠습니까.

글 사진 김순재 계명대 산학인재원교수 sjkimforce@naver.com

이 기사는 계명대학교와 교육부가 링크사업으로 지역사랑과 혁신을 위해 제작했습니다.

◆다시, 사투리 연재 순서

1.왜 다시, 사투리 인가

2.예술 속 사투리

3.사투리와 사람들

4.외국의 사투리 보존과 현황

5.대담

◆사투리 연재 자문단

김주영 소설가

안도현 시인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

김동욱 계명대학교 교수

백가흠 계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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