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양 프로그램들이 과거 사건을 다시 꺼내 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당신이 혹하는 사이', tvN '알쓸범잡'이 그 프로그램들이다. 이들 프로그램들이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은 어떤 진화를 보이고 있는 걸까.
◆'꼬꼬무', 스토리로 다시 들여다보는 현대사
"생방송 중에 벌어진 방송사고…" 장항준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청자로 앉아 있는 정우의 귀가 쫑긋 세워진다. 그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일단 방송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방송 중이라니. 먼저 떠오르는 한 사건은 뉴스 도중 난입한 불청객이 "내 머리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쳤던 그 사건이다.
하지만 장항준과 화자들은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던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라며 청자들의 예상을 일축한다. '의혹투성이', '한국 현대사 최대 미스테리' 같은, 소개될 사건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표현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는 뜬금없이 한 여고생의 시점을 따라간다.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했던 여고생의 이야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의 다섯 번째 이야기 '8.15 저격사건'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만일 처음부터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로 시작했다면 시청자들의 관심은 반감됐을 게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생방송 중 벌어진 방송사고라는 색다른 이야기 방식으로 궁금증을 증폭시킨 후, 육영수 여사가 아닌 이날 저격 사건 속에서 사망한 한 여고생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이처럼 현대에 벌어진 사건·사고들을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풀어낸 프로그램이다. 장항준, 장도연, 장성규 세 명의 스토리텔러가 각각 그날의 게스트를 한 명씩 불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세 명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교차편집해 박진감 넘치는 영상을 구성해냈다.
당시 실제 보도됐던 뉴스 등의 자료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때론 재연을 통해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구현해낸다. 게다가 당시를 증언해주는 인터뷰까지 더해져 우리가 알고 있었다 치부했던 사건의 실체를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해준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했던가. 이 프로그램은 같은 사안이라도 어떤 접근 방식으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묘미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번 보면 끝까지 집중하며 몰입하게 되는 스토리의 힘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당혹사', 음모론을 넘어 의혹 제기까지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 역시 스토리의 힘이 돋보이는 프로그램이다. 어떤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 스토리가 가진 궁금증과 호기심을 끝없이 자극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혹하는 사이'는 소재를 현대사가 아닌 '음모론'에서 가져왔고, 형식도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아닌 '영화를 위한 기획회의'라는 콘셉트를 차용했다. 음모론이 제기되는 사건들을 가져와 거기 더해진 의혹들을 들여다보고, 합리적 의심을 해보고, 때론 상상력을 동원해 추론을 해가면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첫 회에 소개됐던, 10년 전 벌어진 강남경찰서 강력반 막내 형사의 사망을 두고 제기된 의혹들은 사실 음모론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연히 의혹이 남는 여러 지점들을 보여줬다. 자살로 서둘러 종결처리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배후가 존재할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던 것.

그런데 놀라운 건, 당시 사건을 서둘러 자살로 종결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2018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버닝썬 사건에도 또다시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즉 '당신이 혹하는 사이'는 음모론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과거 갖가지 의문을 남긴 사건이 제대로 의혹을 풀지 못함으로써 또다시 유사한 사건이 반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음모론과 의혹 제기는 그 뉘앙스가 다르다는 점이다. 음모론은 오히려 진실을 흐리는 가짜뉴스의 뉘앙스가 강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는 오히려 진실을 향한 첫 걸음의 뉘앙스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 역시 여러 음모론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자칫 이를 확산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일종의 '영화 제작을 위한 기획회의'로 갖가지 상상과 추론을 더할 뿐이라는 걸 애써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음모론이든, 의혹 제기든 그 핵심적인 몰입을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라는 건 동일하지만.
◆'알쓸범잡', 범죄를 소재로 한 '알쓸신잡'의 스핀오프
tvN '알쓸범잡(알아두면 쓸데없는 범죄 잡학사전)'은 그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알쓸신잡)'의 스핀오프다. '잡학' 대신 '범죄'를 특정 소재로 가져왔고, 따라서 '쓸데없는'이 아닌 '쓸데있는' 잡학사전이다. 형식은 '알쓸신잡'과 동일하다. 윤종신, 박지선, 정재민, 김상욱, 장항준이 함께 특정 지역을 찾아가 그 곳을 둘러본 후, 다시 모여 두런두런 그 날의 여행을 통해 '범죄' 관련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방식이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던 박지선 범죄심리학자, 판사에서 지금은 법무심의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정재민, '알쓸신잡'으로도 주목을 받았던 물리학 박사 김상욱 교수에 윤종신, 장항준이 함께 한다.
물론 범죄라는 한정된 주제를 갖고 나누는 이야기는 '알쓸신잡'만큼 풍부하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던 희대의 사건들의 발생 지역을 찾아가 답사하고, 그 사건 깊숙이 들어가 내막과 더불어 의미까지 찾아내는 이야기는 충분히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또한 '알쓸신잡'에서도 다뤄졌던 역사적 사안을 범죄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를테면 유관순 열사의 법정 기록을 찾아본다거나, 4.3 사건을 판결문을 통해 보는 등)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즉 범죄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한쪽 편으로만 봐왔던 사안들도 좀 더 새롭고 다양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당신이 혹하는 사이' 그리고 '알쓸범잡' 같은 프로그램들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건 두 가지 차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범죄나 사건 사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갈수록 강력해지는 범죄의 양상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범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교양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범죄 스릴러가 점점 많아지는 것도 바로 이런 현실의 반영이다.
하지만 이런 범죄라는 소재보다 더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다소 트렌디한 '스토리텔링' 방식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이다. 똑같은 사건이나 범죄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교양프로그램들이 과거에도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이 그 같은 사건을 갖고 와서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내는 건 다름 아닌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 스토리텔링의 강력한 힘에 의해 아카이브로 그저 저장되어 왔던 사건 파일들이 이제 다시 생생하게 우리 앞에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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