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들의 숙명 중 하나는 '암보(暗譜)'다.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악기가 바로 피아노인 것이다. 필자도 콩쿠르에 참가하고 연주회를 했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악보를 보고 연주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연주를 준비하고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동료들과 나누는 안부 인사가 "잘 지내냐"는 말보다 "악보는 다 외웠냐"는 말로 대체되는 웃픈 상황도 연출된다.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한 역사 이래 과거의 연주자들도 암보가 필수였을까? 아니다. 오히려 19세기 살롱음악 전성시대엔 악보없이 연주하는 것이 연주곡을 작곡해 준 작곡가에게 아주 무례하게 구는 예의없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는 작곡을 마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연주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였기에 악보를 외워서 치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을 깨트리고 암보를 시작한 연주자는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1819~1896)이라는 설과,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고난도의 기교를 구사하는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1811~1886)라는 설 두 가지가 전해진다.
클라라 슈만은 남편인 로베르트 슈만의 곡들을 즉석에서 초연하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1837년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하며 "힘차게 날개짓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또한 프란츠 리스트는 요즘 말하는 '팬덤'을 몰고 다닌 스타 연주자로 잘생긴 얼굴과 대단한 기교로 이미 여심을 흔들었는데, 거기에 더해 암보까지 하면서 흥행몰이에 대성공을 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에겐 이들 중 누가 먼저 외우기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 이후로는 피아니스트에게 암보가 필수 과제로 정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아직 암보를 못해 큰 사고가 일어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치러왔던 많은 실기시험이나 연주에서 여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불안한 부분은 늘 존재했고 매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독주회를 한 번 할 때마다 수명이 5년씩 단축되는 것 같다"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말이 뼛속까지 공감이 된다고 하면 그 느낌이 전해질까!
어찌됐든, 잘 되건 안 되건 암보가 피곤한 작업인 건 틀림이 없다. 어차피 나의 독주회인데 뭐 어때, 베토벤도 "외운답시고 엉망으로 치지 말고 악보를 보고 연주하라"고 했다는데, 그냥 악보를 볼 수밖에 없는 레퍼토리로만 독주회 프로그램을 짜볼까, 등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도 결국은 '나도 힘차게 날개짓 하며 하늘로 날아보자'하고 반쯤은 설렘을 가지고, 또 반쯤은 '대체 왜 외워서 치기 시작한거냐'라고 투덜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게 피아노 치는 사람의 숙명이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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