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은 친구가 되기는 어렵지만, 한 번 친구가 되면 평생을 간다. 그들은 낯가림이 심해서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외국인에게는 말을 걸지도 않는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도 만남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무척 오래 걸린다. 그런 영국인을 내가 친구로 얻은 것은 흥미롭다. 수십 년으로 이어진 그들과의 우정은 놀랍기만 하다.
영국의 시골에서 시작된 우정이 25년째다. 매년 그곳에서 한 달 반을 머물렀는데 어김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늘 가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가게를 둘러보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걷고, 옛날 이웃이나 옛날 친구들을 함께 만나기도 했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지금은 독립한 아이들까지 불러 저녁을 먹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탄스럽다. 영국인은 변화를 싫어해서 늘 같은 식당에 가서 같은 음식을 먹는데, 돌이켜보니 우리의 만남도 비슷했다.
그가 소개해준 멋진 노인과의 만남은 특별하다. 여름인데도 넥타이를 매고 주머니에 손수건을 꽂은 모습은 신사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만년필로 내게 글을 써주었는데, 오랜 경험에서 나온 인생의 핵심 같아서 마음 깊이 담아두고 있다. 영국에서도 사라진 '손등 키스'를 받고, 영국에는 없는 '허리를 굽힌 인사'로 답례했던 날을 기억한다.
갈 때마다 같은 집에 머물면서 집주인과는 십년지기 친구다. 꽃을 꽂고 손으로 카드를 써서 환영했는데, 홍차와 커피와 간식이 보태졌다. 물과 주스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라디오와 설거지 선반을 준비해놓았다. 샤워커튼을 새것으로 바꿔놓고, 차를 빌리러 간다니까 태워주기까지 했다.
매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를 위한 일정을 만들었다. 꽃을 사러 가든 센터에 가고, 아름다운 저택을 찾아가서 정원을 감상하고, 예쁜 마을을 둘러본 후 아늑한 티룸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에게 '영감을 줄 사람들'을 소개시켜준다면서 바비큐 파티를 벌였고, 친구들이랑 미술관의 전시를 보고 근사한 식당의 애프터눈 티를 마시러가는 런던 나들이에 나를 끼워주기도 했다. 친구가 되니 친절과 배려가 점점 늘어났다.
일면식도 없는데도 두 친구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닮아있다. 일하는 중에도 빠짐없이 시간을 내고, 기꺼이 나를 데리러오고 데려다준다. 처음에는 쌀쌀맞고 무뚝뚝해 보였는데, 알고 나니 친근하고 따뜻하다. 종종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날리면서도 언제나 예의바르다. 빈말이나 인사치레가 없다. "연락할게."하면 연락하고, "밥 한 번 먹자."고 하면 밥을 먹는 식이다. 내가 영국이라는 낯선 나라를 좋아하고, 영국에서의 삶이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한 것은 모두 친구들 덕분이다.
인생을 사는데 친구와 우정을 빼놓을 수 없다. 완벽한 인생을 바라는 게 아니다. 혼자서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고, 누군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친구는 새로운 풍경이고, 우정은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일이다.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고, 조금씩 알아가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아주 서서히 깊어지는 일이다. 듣고 말하면서 상대를 이해하는 거고, 나도 그렇게 이해받는 거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멋진 곳에 가지 않아도,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함께 이야기만 나누어도 좋았다. 이야기하면서 우정을 나눴고, 오랜 시간을 이어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우정의 정의가 여럿 있겠지만, 나는 "우정은 이야기다."(한병철, <땅의 예찬>)와 "우정은 세월이다."(사노 요코, <쓸데없어도 친구니까>)에 가장 마음이 끌린다.
집에 돌아와서 우정을 찾았다. 손가락만 까닥하면 곧바로 연락이 되고, 관계가 그물처럼 빽빽하게 엮여 있는데도, 우정은 멀리 있는 것 같다. 종종 멀리 떨어져 살면서, 서로 만날 시간을 내지 못하면서, 친구로부터 얻는 기쁨과 풍요로움을 놓치며 산다. 삶을 지탱해 주는데 우정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잊어버리고 산다. 우리의 수많은 만남이 우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이야기'가 빠지고, '세월'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서도 면밀한 계획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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