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동네 이발소와 코로나19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내가 20여 년 가까이 단골로 다니는 대구 시내 동네 이발소가 있다.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발관인데, 10대 후반부터 이발에 종사해 일흔 가까이 돼 보이는 이 아무개라는 성을 가지신 주인아저씨 혼자 이발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여느 이발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발소 내부 정면 대형 유리 거울 위에 10여 개가 넘는 표창장이 쭉 진열돼 있다는 점이다. 대구시장, 보건복지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국무총리 상 등 종류도 다양한 상장과 상패들이 손님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 모든 상장은 이발소가 쉬는 날 주인아저씨가 노인회관이나 양로원, 교도소 등에 오랜 기간 봉사활동을 해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 이런 선한 분 때문에 그래도 이 세상이 그런대로 굴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가봤더니 상장과 상패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무슨 까닭이 있는지 여쭤봤더니 요새는 코로나19 때문에 봉사활동을 못 다닌다고 했다. 이제는 봉사도 못 하는데 굳이 상장을 걸어둘 필요가 있겠나 싶어 다 치웠다고 했다.

그렇다고 상장을 뗄 것까지 있나? 과하다고 속으로 느끼면서 '염치'가 뭔지를 아시는 분 같다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염치'는 선비들의 최고 미덕이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양과 겸손으로 뒤에서 묵묵히 할 바를 다 하는 것이다. 자기과시, 과잉 홍보, 나대기 등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등장한 요즘 같은 세태에 덜 어울릴 수도 있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한번은 이발소 탁자 위에 종이신문이 있어 펴 봤더니, 매월 한 차례 연재하고 있는 내 글에 볼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줄을 쳐 가면서 읽었구나 하고 짐작하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앞으로 좋은 글을 좀 더 쉽게 써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했다.

근래에는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선생의 10주기 기념작으로 나온 '모독'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1996년 노구를 이끌고 후배 작가 몇 사람과 네팔과 티베트 등 오지를 다녀온 여행기이다. 제목이 왜 '모독'일까? 궁금했는데 책의 중간쯤에서 모독이란 단어가 보였다. 티베트 랏채라는 도시에서 한족 식당 부부가 손님이 먹다 남긴 음식을 마치 개죽처럼 만들어 티베트 아이들에게 뿌리듯이 주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 그것은 보시도 아니고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고, 개죽 같은 음식 찌꺼기조차도 못 얻어 걸린 아이들에게 자기 일행들이 빈 페트병, 스티로폼, 라면 용기라도 내주어야 했던(팔아서 돈이 되라고) 과정에서, 거리 여기저기 뒹구는 썩지 않는 화석연료의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폼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 등을 보고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에 '모독'이었으니.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주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요즘 코로나19 백신 문제로 사회가 온통 시끄럽다. 변이와 변종이 어떻고, 백신 공급량이 어떻고, 주사를 맞느니 안 맞느니, 부작용이 있느니 없느니….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종식되기를 전 세계 인류가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래(결코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의 코로나19 사태가 그래도 양호했다고 회상할 더 무서운 시절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연환경 파괴, 소비 욕망의 절제, 자발적 가난, 청빈과 검약에 대한 가치 재발견 등과 같은 엄중한 정신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인류 전체가 파멸할 수도 있다.

상장을 치운 우리 동네 이발소 주인아저씨의 겸양과 염치가 새삼 생각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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