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가. SBS 금토드라마 '모범택시'는 그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가해자들은 처벌조차 제대로 받지 않고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 정의의 현실. 사적 복수 대행 판타지는 여기서 탄생한다.
◆무엇이 사적 복수 대행 판타지를 탄생시켰나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 대신 해결해드립니다.'
절망의 끝에서 한강 다리 위에 선 피해자는 거기 붙어 있는 스티커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한다. '모범택시'라 적힌 그 스티커의 장본인들은 무지개운수라 불리는 택시회사의 비밀 팀이다. 그 곳의 장성철(김의성) 대표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인 파랑새재단의 대표이고, 김도기(이제훈)는 무지개운수 택시기사이면서 사적 복수 대행을 전면에서 이끄는 인물이다.
마치 배트맨 기지를 연상시키는 택시회사 지하기지에는 장성철이 가져온 복수 대행 의뢰를 수행하는 팀원들이 있다. 모범택시에 갖가지 특수한 장치들을 연결하는 기계공 최주임(장혁진), 박주임(배유람)과 이 회사 경리이면서 동시에 해커인 안고은(표예진)이 그들이다.
'모범택시'의 무지개운수라는 사적 복수 대행 업체는 그래서 다분히 허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개연성을 찾아보기 힘든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걸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그곳에서는 배트맨이 바로 출동할 것 같고, 저 바깥세상은 고담시가 존재할 것 같은 허구적 상상력.
하지만 이같은 허구적 설정과는 달리, 이들에게 절망의 끝에서 사적 복수 대행을 의뢰하는 피해자들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잔인한 아동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심신미약으로 짧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조도철(조현우)은 누가 봐도 실제 범죄자였던 조두순 판박이고, 불법 동영상을 찍어 유포하고 갖가지 엽기적인 일들을 벌인 유데이터 박양진 회장(백현진)은 '그것이 알고 싶다'가 다뤄 충격을 안겨줬던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 그대로다.
장애인들을 데려다 감금해가며 갖가지 노동에 폭력을 일삼는 젓갈공장 악덕기업주와 아이들이라고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직적인 학교폭력 그리고 서민들의 피 같은 돈을 사기쳐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만드는 보이스피싱 사기단도 마찬가지다. '모범택시'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공분을 일으켰던 사건 속 범죄자들이다.
이들이 이토록 실감나게 그려지는 이유는 이 작품의 연출자인 박준우 PD가 '그것이 알고 싶다' PD로 일하며 접했던 사건들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들이지만, 생각보다 약한 처벌을 받은 자들이나 법망을 빠져나간 '법꾸라지'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대중들의 공분을 박PD는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살풀이해 보이려 한다.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판타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사적 복수의 사이다와 19금 자극의 불편 사이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먼저 우리가 신문 사회면에서 봤던 그 사건들을 실감나게 재연해 보여준다. 당연히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당하는 가학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연출된다. 시청자들은 한두 회에 걸쳐 피해자들이 겪는 상상초월 고통을 실감하며 다음 회에 처절한 응징으로 이어질 사적 복수의 사이다를 기대한다.
무지개운수팀이 사적 복수를 위한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 과정은 마치 케이퍼무비처럼 그려진다. 여러 팀원들이 저마다의 유기적인 역할로 임무를 수행하고 여지없이 펼쳐지는 사이다 복수는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단순하지만 현실에서 볼 수 없었던 가해자들에 대한 응징이 시원스레 펼쳐진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의외로 강력한 극성과 몰입을 만들어낸다. 10%(닐슨코리아 기준)로 시작한 시청률은 최고 16%까지 올랐다.
하지만 시원한 카타르시스에는 어딘가 찜찜함이 남는다. 그것이 가해자들에 대한 사적 복수 판타지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 전에 이 사이다 복수를 위해 전제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에 대한 가학적인 장면들이 마치 전시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번째 사적 복수 에피소드로 등장했던 젓갈공장 이야기에서 장애인 여성 피해자를 드럼통에 가둬 냉동실에 넣어 놓는 장면이나, 성폭행 장면 등이 불편한 논란을 만들었다.
불법 동영상 범죄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들의 유출된 사적 동영상을 '음란물'이라고 표현하는 장면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상, 피해 장면의 전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응징을 위한 설정이라 해도 불편함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애초부터 19금 등급을 매겼고, 시작과 더불어 '피해사건이 묘사될 때 불편한 장면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사전 고지를 넣었다. 또한 드라마가 자극으로만 소비될 것을 우려해서 엔딩 장면에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대사들'을 자막으로 넣었다.
'누군가에겐 학창시절의 작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죽고 사는 문제일 수 있으니까'라는 문구는 학교폭력 에피소드에 들어갔고, '너 여기만 광산인 것 같지? 나한테 50원, 100원 내고 다운로드 받아가는 그 개××들이 다 내 광산이야!'라는 문구는 불법 동영상 범죄 에피소드에 담겼다.
◆과장된 캐릭터들과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허구성
하지만 자극성과 불편함을 상쇄시켜주는 건 이런 등급과 사전 고지, 문구보다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과장된 캐릭터들과 장면들이다. 즉 애초에 무지개운수팀을 배트맨 기지에서 튀어나온 다크히어로처럼 그려낸 것 자체가 이 작품이 가져온 현실적 사건들의 자극성을 비현실적 상상력으로 눌러주기 위함이다. 이들이 붙잡아 직접 처단하기보다는 낙원신용정보 대모 백성미(차지연) 같은 지하금융계 큰손의 힘을 빌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죽어 마땅한 가해자들이지만, 만일 드라마가 무지개운수 팀원들의 손으로 직접 그들을 처단하는 장면을 보여줬다면 시청자들은 아마도 '윤리적 딜레마'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건 살인자들과 다를 바 없는 행위가 될 수 있어서다.
물론 이러한 드라마의 윤리적 선택 앞에서 보이는 '머뭇거림'이 더 과감하게 펼쳐나가지 못하는 한계를 만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한 복수 게임 같은 허구라는 걸 이런 캐릭터들과 장면들이 보여줌으로써 지나친 자극에서 오는 불편을 덜어주는 효과를 준다.
특히 과장되게 표현된 악역 캐릭터들에서는 카타르시스와 더불어 일종의 풍자적인 시선까지 느껴진다. 불법동영상업체 유디스크의 박양진 회장이나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수장인 조선족 림여사(심소영) 같은 악당 캐릭터들은 실제 인물에서 가져왔지만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그 연기 자체가 저들을 풍자하는 것만 같은 뉘앙스를 부여하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모범택시'의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설정은 자극적이고 도발적이다. 그 자체가 허구적 상상력이라는 걸 드러내지만, 그것이 꼬집고 있는 정의에 대한 질문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정의가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면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상상력이 튀어나오고, 그것이 시청자들의 열광으로 이어질까. '모범택시'를 보다 보면 한 편의 사회 비판적인 퍼포먼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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