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스승의날이 오면

이철우 대구콘서트하우스 관장
이철우 대구콘서트하우스 관장

필자에게는 스승의날이면 꼭 전화라도 드려서 안부를 묻는 몇 분의 선생님이 계신다. 필자는 복도 많아서 참으로 훌륭하신 선생님들에게 지도를 받았다.

첫 번째 선생님은 필자가 작곡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음악의 본질을 일깨워 주신 분이시며, 교수로 지휘자로 대구 음악계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치셨다.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동료 교수들을 채용하실 때는 늘 자신보다 능력 있는 분들을 발탁하셨다.

한 번은 선생님께 "그분들의 명성이 선생님보다 보편적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는데 그것이 부담스럽지 않으십니까?"라고 겁도 없이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의 답은 명료하였다.

"나보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나의 친구가 되어야 나에게도 발전이 있다."

이 말씀은 필자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한 명령이었다.

필자는 대학시절에 광주사태 등 민주화 과정을 격은 탓에 대위법이란 과목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고민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본인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계시다며 필자를 그 선생님께로 안내해 주셨다.

이 두 번째 선생님은 대구에서 필자의 첫 선생님과 동료 교수로 같이 활동하셨지만 후일에 서울대 교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다. 그리고 이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2세대 대표 작곡가 마에스트로 김달성 교수님을 소개해 주셔서 필자는 대학원 과정을 그 교수님 문하에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김달성 선생님께서 필자에게 던지신 첫 요구는 "먼저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인간이 돼라!"라는 말씀이셨다. 대학원 3학기를 마칠 무렵 선생님은 뇌종양 때문에 거의 1년을 무의식 상태로 병원에 누워계셨지만 수술의 성공으로 불사조처럼 의식을 회복하시고 20여 년을 건강하게 활동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필자가 유학을 마치고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한 가지 큰 숙제를 주셨다.

"한국은 원래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 싸우는 민족이 아니었다. 한국뿐 아니라 유라시아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지녔던 근원적 대국 정신을 작품으로 만들어라!"

필자는 "과분한 숙제를 제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사양하듯 반문하였다. 선생님은 "이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하고 싶었지만 못 이룬 일이니 거절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 후, 작고하시기 전 1년을 다시 거의 무의식 상태로 병상에 계셨다. 병문안을 갔을 때 선생님께서 순간적으로 의식을 회복하셔서 "이 선생 왔어?"라고 말씀하시며, 한동안 눈을 마주치며 손을 잡고 약한 음성으로 대화를 하였다. 그때도 선생님은 "내가 준 숙제 꼭 해줘!"라고 당부하셨다. 그 후에 가족들로부터 이 대화가 선생님의 거의 마지막 대화였다고 전해 들었다. 그 유언적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그리고 이미 작고하셨지만 필자의 작품들이 합창을 비롯한 성악과 깊이 연관되어 있도록 귀를 열어 주신 합창지휘자이셨던 선생님, 서울 진학을 위해 짧게 지도를 받았으나 살아 생전 길게 필자의 성장 과정을 기다려 주셨던 존경하는 선생님, 그리고 또 한 분, 대학과정의 지도교수이셨으며 그야말로 아버지같이 이끌어 주신 팔순의 선생님. 이분들의 관심이 한 작곡가를 만들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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