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채가 날로 늘어나서 사사롭게 잔치를 열 수 없어, 그 비용 백금(百金)을 의소(義所)에 보내고 나서, 손님과 친구들을 빈 속으로 대하니 또한 스스로 부끄럽다"
한말 유학자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선생이 1907년 환갑을 맞아 환갑잔치 비용을 국채보상 기부금으로 보낸 후 2월 20일자로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 선생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자식들에게 환갑에 관한 일체 행사를 금하고 그 돈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기부하고, 찾아오는 손님과 친구들에게 별다른 음식을 대접하지 못해 부끄러웠다는 내용이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58만여점의 소장자료 중 이승희·장석영 선생 등 한말 유학자들이 주고받은 편지 9천여 통을 발굴했다.
편지가 실린 '간찰첩'은 인동장씨 남산파 회당고택에서 보관해오다가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이 간찰첩들은 '최근첩'(最近牒) 65책, '어안첩'(魚鴈牒) 18책, '통신첩'(通信牒) 10책 등, 모두 92책이며 한 책당 100여통의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는 주로 회당 장석영이 받은 편지다. 표지에 보낸 사람의 성씨를 기재해 두었다. 인동장씨, 진성이씨, 선성김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안동권씨, 남씨, 신씨, 류씨, 송씨, 여씨, 백씨 등 다양하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의병전쟁과 국채보상운동 등에 관해 각처에 보낸 통문, 시회에서 지은 시를 묶은 '시축'(詩軸), 학문을 강론한 '강회'(講會) 기록 등에 관한 것이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자료는 이승희가 보낸 편지를 따로 모아둔 '대계첩'(大溪帖)이다. 이승희의 편지는 다른 간찰첩에도 수록돼 있지만, 별도의 책으로 묶어둔 까닭은 두 사람의 인연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장석영은 이승희의 아버지 한주 이진상에게 글을 배운 제자였고, 나이 또한 비슷했기에 두 사람의 우의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이승희는 환갑 이듬해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교민들을 위해 공교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승희와 장석영 두 사람 모두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이 편지가 쓰인 시기는 대체로 개항 무렵인 1870년대부터 장석영이 사망하기 전인 1920년대 초반까지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국권을 상실했던 당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했던 선현들의 사상과 흔적이 담긴 소중한 서간문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고자 번역작업이 마무리되면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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