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가 읽은 책] 센 강둑에서 파울 첼란을 만나다

시인의 집(전영애 글/ 문학동네/ 2015년)

초여름 강둑-김남이
초여름 강둑-김남이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의견을 나누고, 강연을 듣던 일이 아주 옛일이 되어버렸다. 해외를 수시로 다녀오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낯설다. '코로나 시대'라는 뜻밖의 시간을 살고 있는 까닭이다. 많은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는 것도 점점 익숙해지지만 한편에선 다들 그만큼 지쳐가고 있다. 이즈음 이 책이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는 '천지사방의 먼먼 길들'을 '문득문득 달려갔다'고 했다.

탐방기나 르포를 위한 일로서가 아니라 '큰 물음의 무게가 혼자서는 감당해 내기 어려워질 때마다' 작가가 달려간 곳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독일어권 시인들의 생가나 한때 기거했던 장소들이다. 위대한 시가 탄생한 현장이기도 한 그 장소들을 찾아 파리, 로마, 프라하, 아드리아해, 도나우 강가, 라론 계곡, 바이마르, 프랑크푸르트 등지로 달려갔고, 그 기록을 '시인의 집'으로 묶었다고 했다.

저자 전영애는 서울대와 독일의 몇몇 대학에서 독문학 교수와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괴테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할 만큼 독일 문학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손꼽히는 인물이다.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파울 첼란의 시'를 비롯한 많은 저서를 출간했고, '카프카, 나의 카프카' 등의 시집을 국내와 독일에서 펴냈으며, 수십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이 작가가 물음을 안고 서성였던 시 혹은 삶의 부근을 따라가 보려 한다.

"이렇게 여기쯤에서 첼란 역시 이따금 저 서먹한, 그러나 일말의 그리움을 끊을 수 없는 남들의 삶을 관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자신의 거처로 무거운 발을 옮겼을 것이다. 꼭대기층쯤이었을 황량한 방."(69쪽)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둑에 앉아 작가는 청년 첼란을 떠올린다. 부모가 나치에 끌려가 죽고, 혼자 노동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파리에 닿은 스물일곱 살의 첼란이 절망의 끝에서 수없이 오갔을 장소인 것이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법학 공부에 지친 카프카가 자주 창밖을 내다보며, 건너편 가게 점원과 눈길을 맞추기도 했던 집이다. 그 옆집 약국 건물에서는 판타 길에서 여는 저녁 모임이 있었고, 청년 카프카가 종종 참석했다.(131쪽)"

프라하의 어떤 건물 앞에서 작가는 카프카의 한 시절을 실제인 듯 본다. 40대 중반에 교수에 임용되기까지 작가가 절망적 시간을 견뎌내는 데 카프카가 큰 힘이 되었다 하니, 그 자리에 선 감회가 어땠을까 싶다.

첼란과 카프카 외에도 릴케, 바하만, 쿤체, 하이네, 브레히트, 괴테 등 11명의 시인들이 머물렀던 삶의 장소를 우리도 작가의 발길 따라 만날 수 있다. 시, 사진, 여정과 시인들의 삶이 함께 실려 있어 더욱 실감 나는 책상 앞 여행이다. 다른 세상에 좀 옮겨 앉고 싶거나 낯선 각도의 시야가 그리울 때 한 곳씩 아껴 찾아도 좋으니 495쪽의 두께도 그리 무겁진 않을 것이다.

김남이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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