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를 간명하게 정의한 이 말의 최초 사용자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이다. 실존(existence, 實存)이란 개별 존재자가 세계 속에 실제로 있다는 뜻이다. 실존이 본질(Essence, 本質)에 앞선다는 주장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고, 실존은 본질의 한 양상일 뿐이라는 전통철학의 가르침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사르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질 자체를 무(無)로 선언한다. "당신은 자유이다. 그러니 선택하라."
실존주의는 양차 세계 대전 후 삶의 좌표를 상실한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나침판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세상에 홀로 던져진 존재자라는 것, 삶은 대본 없는 선택이며,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인수해야 한다는 것은 전후(戰後)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수긍하는 주장이었다.
'실존적 결단', '부조리', '반항', '자유'와 '책임' 등의 실존주의의 용어들은 1950년대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유행어가 되었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은 지식인에게 실존주의만큼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해주는 이론도 없었다. 김수영이 자신의 무덤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을 함께 묻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 그리고 기국서의 '부조리 연극'에서 실존주의의 영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70년대까지 대학의 철학 강좌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단연 '실존철학'이었다.
경북대 도서관은 독일 철학자 막스 뮐러(Max Müller, 1906-1994)의 Existenzphilosophie im geistigen Leben der Gegenwart('현대의 정신적 삶에서 실존철학') 1949년 초판본을 국내 도서관 중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다. 막스 뮐러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두 번의 개정판(1957년 2판, 1964년 3판)을 내게 된다. 그만큼 실존철학에 대해 언급할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는 것과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막스 뮐러는 49년의 초판 저서를 하이데거의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바친다고 속 표지에 밝히고 있다. 막스 뮐러가 하이데거의 수제자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스승의 이론을 단순히 추종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저서는 지금도 실존철학에 관한 지형을 탁월하게 조망한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막스 뮐러의 1949년 초판본이 경북대 도서관에 소장될 수 있었던 것은 필자와 관계가 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유학 생활에도 필자가 누렸던 유일한 호사는 토요일 오후 고서점에 들르는 것이었다. 매주 가판대에 새롭게 올라온 책을 구경하고 원하는 책을 겁 없이 사곤 했다. 어느 날 막스 뮐러의 초판본이 내 눈에 띄었고, 주저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이후 막스 뮐러의 책은 내 서가에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국내 도서관 중 막스 뮐러의 1949년 초판을 소장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경북대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필자의 결정은 귀중본을 경제적 가치로만 보는 사회적 통념에 반항하는 실존적 결단이라 할 수 있겠다.
정낙림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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