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이승의 삶을 마친 이종찬(李鍾贊)이란 군(軍) 출신이 있었다. 한국군 역사에 한 이름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유복한 집안의 맏아들로 일제 무단통치가 기승이던 시절인 1916년 3월에 태어났다. 일본 육사를 나와 2차 세계대전에 일본군으로 참전, 일본 패망과 광복 뒤 한국 군인으로 새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1917년생인 군대 후배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한 시대를 부대끼며 여러 궤적이 겹쳤다. 또한 1936년생으로 한자 이름까지 같고 안기부장을 지낸 이종찬 정치인과도 인연 있는 문중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故) 이종찬 군인은 일본 육사 졸업과 장교로 참전한 전력 등으로 뒷날 친일 인명사전에도 올랐다. 그렇지만 그의 삶에는 뒷날까지 소환되는 몇 가지 일들이 있다.
한국전쟁 중 별 셋의 중장으로 육군참모총장이던 1952년 5월, 부산 피난 정부를 이끌던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탄압 목적의 군대 병력 동원을 반대하고 맞서다 그해 7월 참모총장에서 해임됐다. 또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에 박정희 당시 소장과 함께 반대했다. 스스로 군대의 정치 참여나 정치 군인이 되길 거부하는 길을 가려 했다.
뒷날 대통령과 국회의원 출마를 바라는 주변 권유도 뿌리쳤다. 물론 후회했던 두 번에 걸친 유정회 국회의원과 이탈리아 대사를 지내는 외도(外道)도 있었다. 오롯한 군인의 길은 걷지 못한 일생이긴 했지만 정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됐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는 그 나름 정치 격변 속에서도 하늘이 내린 평생을 누린 셈이다.
그는 자신처럼 군문(軍門)에 몸을 담았다가 숱한 정치 격변 속에 다른 길을 갔던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군 출신 인사들이 비명(非命)에 횡사(橫死)하는 일을 지켜봤다. 일본 장교 경력 등으로 친일 인명부에 오른 점을 뺀 광복 이후 그가 걸었던 군인의 길은 그 나름 수긍할 만도 하다. 이는 그가 죽은 그해 6월 제출된 한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조명될 정도였으니 광복 이후 '정치 군인'이 아닌 '직업 군인'의 길 선택은 아마도 잘한 일인 듯싶다.
대통령에 맞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군인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를 추적하면 최고 권력과 갈등을 빚다 스스로 옷을 벗고 검찰을 떠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겹친다. 활동 무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없지 않다. 최고 권력자와의 갈등 끝에 조직을 떠났고, 대통령 출마 같은 정치권 유혹의 목소리도 높고, 주변 세속의 분위기도 호의롭다.
윤 전 총장의 선택지가 무엇일지 알 수는 없다. 지난 한국 선거사에는 국민이 좋아할 만한 화려한 간판 출신이나 이름 있는 법조계 인사 등이 '정치 훈련'도 없이 지름길 대선에 나섰다 낙마한 사례가 여럿이다. 저마다 상처투성이가 됐다. 여론조사 지지도에 기대어 무턱대고 달려들었다 헛물켜지 않았던가. 지금은 과연 달라졌을까.
상대가 제기한 의혹, 흑색 선전, 비방 등이 난무하고 지난날의 가려진 부끄러운 일부나마 드러나는 바람에 가슴속 희망처럼 품었던 괜찮은 인상조차 싹 사라졌다. 내년 3월 9일 치러질 21대 대선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진흙탕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럼 꽃길을 걸었던 윤 전 총장은 무사할까. 차라리 출마 대신 권력에 맞서 정치 중립의 가치를 지키려 한 '그가 있었지!'라는 기억 속 존재로 가슴에 남는 길은 어떨까.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굳이 정치를 할 속내이면 여의도 입성과 처절한 정치 내공 다지기 수련 뒤에도 늦지 않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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