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반친소] 실험실 밖에서 새 삶 찾은 실험견…"저도 이름 생겼어요"

14년 전 지인 통해 실험견 비글 입양…첫 만남엔 켄넬 안에서 덜덜 떨기만
재촉 않고 기다리니 결국 마음 열어…'병균 덩어리' 잘못된 편견 가슴 아파

비글은 개체 간 균일성이 뛰어나고 집다 생활에 익숙하며 무엇보다 사람에게 순종적인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험견으로 사용된다.
비글은 개체 간 균일성이 뛰어나고 집다 생활에 익숙하며 무엇보다 사람에게 순종적인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험견으로 사용된다.

"철컹" 이날도 어김없이 철창 문이 열렸다. 그리고 늘 그랬듯 흰 가운 입은 남자가 나를 번쩍 안아 든다. 좁은 철창을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잠시, 이내 공포가 엄습해 온다. 오늘은 얼마나 아플까. 고통스러운 주삿바늘과 차가운 철재 수술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다. 지독한 소독약 냄새는 옅어지고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들이 코를 자극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덜컹대는 소리가 차츰 잦아 들더니 문이 활짝 열린다. "구생아" 2007년 1월 21일. 나는 이름이 생겼다. 九生. 초년에 고생했으니 아홉 번 사는 것만큼 건강하고 오래 살아라는 뜻이란다.

◆ 일련번호로 불리던 실험견, 이름이 생기다

대구 달서구 진천동에 사는 이덕희 씨는 14년 전 실험견 비글 한 마리를 입양했다. 당시에는 실험견 보호단체는 물론 실험견 구조단체로 유명한 '비구협(비글구조네트워크)'도 생기기 전이라 실험견이 일반 가정으로 입양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연구가 끝난 구생이를 가엽게 여긴 실험소 직원이 덕희 씨 지인에게 구조 요청을 했고, 그렇게 구조된 구생이를 덕희 씨가 입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구생이가 어느 실험소에 있었는지, 어떤 연구에 투입됐는지는 알 수 없다. 구생이를 건네받을 당시 케이지에 오줌이 흥건했고, 토한 자국이 곳곳에 있었던 걸 보아 꽤 먼 곳에서 왔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실험소 직원은 구생이를 건네며 몇 번이나 당부했단다. "실험소에서 나온 사실을 절대 노출하지 마세요. 귀에 찍힌 번호를 병원에서 물어봐도 유기된 걸 주웠다고 말해주세요" 실험견 구조 전문 단체가 생긴 지금도 실험견 구조는 여전히 쉬쉬하는 분위기다.

비글은 개체 간 균일성이 뛰어나고 집다 생활에 익숙하며 무엇보다 사람에게 순종적인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험견으로 사용된다.
비글은 개체 간 균일성이 뛰어나고 집다 생활에 익숙하며 무엇보다 사람에게 순종적인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험견으로 사용된다.

'87XXXXX' 구생이의 왼쪽 귀 안쪽에는 푸르스름한 문신 자국이 남아 있다. 실험소에 넘겨지기 위해 새겨진 일종의 판매 넘버링 같은 개념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가 발표한 2019년 기준 동물실험에 동원된 개는 1만2302마리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대부분은 비글 종이다. 비글이 동원되는 이유는 사람 말을 잘 따르고 온순해서 고통을 느껴도 크게 반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생이는 비글 중에서도 '마샬 비글'이라는 브랜드인데, 미국을 본사로 영국과 중국에 생산 기지를 두고 있다. 동물 실험에 이용되는 실험견은 유전적, 생태적 조건에 결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모종을 교배시켜 생산된다. 이렇게 생산된 실험견들은 과학계나 제약회사의 실험 결과에 공신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차 소리만 들려도 벌벌 떨던 구생이는 이제 차도 잘 타고 밥도 잘 먹고 산책도 잘 한다. 보호자가 꾸준하게 사랑만 준다면 실험견도 일반 가정에 입양 돼 잘 살수 있다.
차 소리만 들려도 벌벌 떨던 구생이는 이제 차도 잘 타고 밥도 잘 먹고 산책도 잘 한다. 보호자가 꾸준하게 사랑만 준다면 실험견도 일반 가정에 입양 돼 잘 살수 있다.

"구조된 지 1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귀를 만지면 움찔 움찔 해요" 구생이와의 첫 만남이 눈에 아른거린다는 덕희 씨. 켄넬 안에 있는 구생이는 많이 떨고 있었고,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단다. 하지만 공격성은 전혀 없었다고. 사람 손이 다가가도 움찔대기만 할 뿐 피하지 않았다. 실험실로 끌려가던 습성이 남은 걸까. 사람 손이 오면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보호단체가 생긴 요즘엔 구조된 아이들이 입양인을 바로 만나는 경우가 없다고 해요" 구조된 아이들은 쉼터에서 우선 사회화 교육과 합사 훈련을 받는다. 세상과 만날 준비를 거친 뒤 일반에 입양되는 것이다. 섣부른 입양으로 인한 파양과 유기를 막기 위함이다.

실험소에서 나온 구생이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실험소가 아닌 흙을 밟고 산책을 하는 구생이의 모습.
실험소에서 나온 구생이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실험소가 아닌 흙을 밟고 산책을 하는 구생이의 모습.

◆ 실험소 밖으로 나왔지만 모든 것이 처음

철창이 세상의 전부였는데, 이제 와서 그 세상이 전부가 아니란다. 자꾸 밖으로 나와보라고 보챈다. 구생이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덕희 씨는 데려온 지 며칠이 지나도 켄넬 밖으로 나오지 않는 구생이가 답답했다. 켄넬 안에서 떨기만 하고, 음식으로 유인해도 곧장 켄넬로 들어갔다. 발톱 하나 잘라주는 데에도 꼼짝 않는 구생이 탓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밖으로 나와 좋은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겠건만 켄넬에 자신을 가두는 구생이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재촉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그 세상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보자고. '구생이가 켄넬 안에 들어가면 억지로 나오게 하지 말기' 아직까지도 지켜지고 있는 덕희 씨 집의 규칙이다. 들어가면 들어가는대로, 나오면 나오는 대로 그냥 두었더니 구생이는 천천히 가족들 곁으로 왔다.

켄넬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병원에서 산책을 시작해 보라는 처방이 떨어졌다. 호기심 많고,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다 보니 곧장 나무 옆에서 킁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엎드려서 소변을 지렸다. 구생이에게는 모든 게 처음이었으리라. 그 흔한 차 소리마저도. 두류공원에 데려가 잔디밭 위에 올려놓으니 잠깐 멈칫하다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강아지들과의 접촉은 여전히 경계했다. 작은 아이가 다가와도 무서워하고, 짖는 소리가 들리면 덕희 씨 품으로 파고들었다. 동물실험에 이용되는 비글은 각각의 공간에 갇혀 지내기에 서로 마주칠 일이 전혀 없다. 실험실에서 몇년을 함께 해도 서로 얼굴조차 모른다. 집단 생활을 해야 하는 비글의 본능은 억누른 채 아이들의 온순함 만이 실험에 이용된다.

구생이 견주 이덕희 씨는 실험견 봉사에 적극적이다. 구생이를 데려온 곳은 아니지만
구생이 견주 이덕희 씨는 실험견 봉사에 적극적이다. 구생이를 데려온 곳은 아니지만 '비구협' 온라인 카페를 들락거리며 구조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 구생이 같은 아이들 보면 그냥 못 지나쳐

"그 곳에가면 구생이 같은 아이들 천지에요. 우리 구생이 보면 실험견도 일반 가정으로 입양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 아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가 닿는 대로 봉사하고 싶어요"

'그 곳'은 구조된 실험견들을 보호하고 있는 논산 쉼터다. 비구협을 통해 구조된 동물들은 논산, 포천, 보은 쉼터 세 곳에서 보호되며 제 2의 인생을 살기위한 교육이나 과정을 밟는다. 비구협은 실험비글을 구조하기 위해 2015년 만들어진 단체로, 지금은 실험비글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을 구조하는 역할을 한다. 얼마전 대구 동물원에서 방치 돼 학대 논란에 휩싸인 양들도 비구협에서 구조를 맡았다. 지금 그 양들은 비구협 논산 쉼터 한 켠에 보호 중이다.

덕희 씨는 실험견 봉사에 적극적이다. 구생이를 데려온 곳은 아니지만 '비구협' 온라인 카페를 들락거리며 구조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얼마 전에는 '해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믹스견 한 마리의 임시보호를 맡기도 했다. 사실 해밀이는 실험견은 아니다. 실험견들은 이슈가 되면 언론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나마 홍보가 잘 돼 임보(임시보호)나, 입양 신청이 잘 들어오는데 일반 유기견은 들어오면 몇 년이고 임보 한 번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2017년부터 3년간 임보 한번 못 나가고 논산 쉼터에 있었던 해밀이를 대구로 데려왔다. 해외 입양이 결정된 후 맡게 된 임보였는데, 해밀이를 인천공항까지 데려다 주는 것까지가 덕희씨 임무였다.

"실험견도 일반 가정에 입양 돼 평범하게 살수 있어요" 덕희 씨와 구생이는 14년 째 행복한 동거 중이다.

◆ 실험견 입양, 편견 가질 필요 전혀 없어요

"가까이 가지 마, 무슨 병인 줄 알고" 산책 모임을 몇 번 나가면 구생이의 실험견 이야기는 공원을 떠돈다. 숨길만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닐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퍼렇게 귀에 찍힌 번호처럼, 이런저런 소문은 족쇄처럼 구생이 곁을 맴돈다. 실험견을 병균 덩어리로 인식하는 일반인들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편견이다. 구조되는 실험견들은 애초에 건강에 이상이 없을 경우 실험소에서 나오게 되고, 나오고 나서도 단체를 통해 검사를 받고 꼼꼼하게 관리된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일반 분양된 강아지들과 크게 차이 없어요" 실험견이라고 해서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한다거나, 어떤 큰 트라우마로 인해 이상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실험견이라고 우울할 것이라는 것도 기우에 불과하다. 물론 강아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강아지를 데리고 오든 적응하는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실험견을 데려가라고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실험견이 있다는 것. 사람들의 화장품이나 약품 등에 의해 희생되는 강아지가 있다는 것.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만 좀 가져달라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덕희 씨는 말한다. 실험견이 제2의 견생을 사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지금도 수많은 실험견들이 평생 고통만 당하다 죽어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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