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열면 나는 아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은 것처럼 보인다. 카카오톡 친구 리스트에 수백 명이 뜨고 SNS 페친(페이스북 친구), 인친(인스타그램 친구)까지 합치면 천 명이 넘는 '친구'가 존재한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한 어느 늦은 밤, 정작 전화를 걸 친구가 별로 없다. 꼽아보면 겨우 두세 명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한 명에게도 전화를 걸지 못하지만 말이다. 휴대폰에 저장된 친구가 많아질수록 역설적으로 친구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무엇이 문제인 걸까.
얼마 전, 고등학교 때 친구 S가 아침 일찍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책방까지 찾아왔다. 멀리 살기도 하고 애 키우고 일하느라 십 년 넘게 못 본 사이인데 오랜만에 만나서는 "너 왜 이렇게 살쪘냐?", "너 요즘도 성격 이상하냐?"가 우리가 나눈 아주 친밀한 인사였다.
그날따라 책방에 손님이 많아서 나는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고 덕분에 친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방에서 책만 보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얘기도 많이 나누지 못하고 대구 구경을 시켜주지도 못했고 근사한 밥을 먹지도 못했지만 친구와 나는 그냥 좋았고 편안했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왜 이야기 나눌 친구가 없다고 느꼈는지 깨달았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쓰는 줄임말 중에 '어사'와 '찐친'이란 단어가 있다. 어사는 어색한 사이, 찐친은 진정한 친구의 줄임말이다. 예쁘게 한껏 치장을 하고 나타났을 때 "우와~ 너무 예쁘다"라고 칭찬한다면 어사이고 안 어울린다고 비웃으면 찐친, 헤어질 때도 인사말이 길면 어사, '간다~'에 '어~'라고 답하면 찐친이란다.
좀 과장된 말 같지만 친구사이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친구는 서로의 꾸민 모습보다는 민낯이 친숙하고, 짧지만 솔직한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아닐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민낯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다. 성인이 된 이후 친구 사귀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는 서로 간에 이미 두꺼운 포장에 싸인 채로 만나기 때문이다.
솔직한 대화로 발생하는 껄끄러움을 미연에 방지하지 위해 되도록 듣기 좋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대화 중간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은 더 참기 힘들다. 그래서 침묵마저도 불필요한 대화로 포장한다. 친하지 않을수록 궁금하지도 않은 근황, 잘 알지도 못하는 정보교류,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 알고 싶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다. 그런 대화는 아무리 길어도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친구 S와 내가 기억하는 서로의 모습은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하고, 사춘기로 성격도 까칠해 걸핏하면 싸우기도 하고, 성적표 받고 질질 짜며 울기나 하던 못난이들이다. 못난이끼리는 연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연대감으로 견뎌올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흑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덕목을 갖춘 멋있는 인간이 될수록 어쩌면 '찐친' 사귀기는 점점 힘들어질는지도 모르겠다. 더 외롭게 늙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포장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못난이가 되어 먼저 이렇게 외쳐본다. 친구야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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