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의 익숙한 순서인 매난국죽은 춘하추동의 계절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 애호되던 이 군자 식물들이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사계절에 맞추어진 것이다. 여름의 군자가 곧 난초이고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난초그림이 '불이선란'이다.
그런데 '불이선란'은 우리의 시각 경험 속에 있는 이전의 어떤 난초그림과도 비슷하지 않고 김정희 자신의 예전 묵란과도 다르다. 이 유별난 그림에 김정희는 20년 만에 우연히 그렸는데 내 마음 속의 난과 꼭 맞아 마치 유마거사의 불이선(不二禪) 같다고 한 화제를 써넣어 이 그림의 제목이 되었다.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4번이나 더 화제를 써넣어 화면이 글씨와 인장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김정희가 이렇게 거듭 화제를 써 넣은 일은 유례가 거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화제에서는 오직 이 한 점일 뿐 두 번 나올 수 없다는 "지가유일(只可有一) 불가유이(不可有二)"라고 하며 유일무이한 작품임을 스스로 자부했다.
담담한 옅은 먹으로 잡초처럼 그린 난초 잎들은 바람을 받고 있는 듯 한쪽 방향으로 쏠려 있는데 정작 난초 꽃은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 난초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고 바람 불 때의 모습도 아니다. '세한도'에서 둥근 창이 반대쪽에서 들여다 본 듯 그려져 집을 그린 시점과 어긋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대상을 빌려올 뿐 묘사하려는 것이 아닌 그림이 문인화이다. 난초에 의탁해 내 마음을 그림으로 옮겼을 때 내가 생각했던 바에 불이(不二)로 딱 들어맞는 회심작(會心作)이 나오기도 평생에 드문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알아볼 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4번째 화제에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세인나득지世人那得知 나득호지야那得好之也)"라고 했다.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득의작(得意作)임을 반복해서 그림 속에 밝혀놓은 것이다.
다섯 차례나 화제를 써 넣고 그 때마다 낙관을 했기 때문에 김정희의 인장이 5방이고, 나머지 10방은 소장 이력이 오규일→김석준→장택상→이한복→손재형→이근태→손세기→손창근 등으로 바뀌면서 그 자취가 남게 된 감상인(鑑賞印)과 소장인(所藏印)이다.
'불이선란'은 김정희의 거듭된 자부로 인해 의미와 가치가 더욱 높아졌고 컬렉터들은 이 천하의 명품을 모시고 싶은 소유욕을 불태웠다. 소장인과 감상인은 모심을 획득한 이들의 기쁨이 세심하게 남겨진 자취이다. '불이선란'은 손창근 선생에 의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이제 누구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손창근 선생은 2020년 애착이 컸던 '세한도'마저 내놓아 아름다운 기증을 완성했다. '불이선란'의 소장 이력은 시원하게 종료되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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