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친구와 쇼핑을 갔다. 한 여인이 친구에게 다가와 "머리에 스티커가 붙어있네요."라며 스티커를 떼어줬다. 당황한 친구가 '5파운드 99펜스'라고 적힌 가격표를 보고, "제가 이보다는 더 값어치가 있으면 좋겠네요."라며 웃어넘겼다. 이어서 "그럼요. 그보다는 훨씬 더 값어치가 있죠."와 "남편이 그걸 알면 다행이라니까요."를 주고받았다. 나도 합세해 함께 웃었다.
만나자마자 친구들이 좁은 차 안에서 큰소리로 수다를 떤다. 미술관에서는 모르는 여인에게 다가가 "가방이 예쁘다."며 "어디서 샀느냐?"고 묻는다. 대화는 "미술에 관심이 있으니 좋은 강좌를 소개시켜주겠다."로 발전하더니, 급기야는 가슴을 헤치며 얼마 전에 받은 심장수술의 자국까지 보여준다. 세상에나!
초면인 여인들이 동지라도 된 듯 깔깔 웃고 낯가림이 없다. 친구들끼리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모르는 사람과 '보통 때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내밀한 대화'를 나눈다. "영국인은 일상의 대화에서 흥분하지도 활기차지도 않는다고 믿어버리는 사람은 영국 여성들의 가십을 들어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영국인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는 규칙은 남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라는 글을 현장에서 본 듯하다.
영국에는 세밀하고 복잡한 문화적 규칙이 많다. 줄서기는 철저해서 혼자서도 줄을 선다. 식당에서는 "부탁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며 주문해야 하고, 먹을 때는 절제하며 조용히 천천히 먹어야 한다. 칭찬은 너무 확실하지 않도록 모호하게 하는 것이 좋고, 유머는 '우습기는 우스우나 겸손하게 말하는 정도로만 우스워야'한다.
돈 얘기는 절대 금지이므로 집값이나 물건 가격을 물어보지 않으며 모든 금전 관계는 편지나 이메일로 한다. 자기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되므로 장례식에서 눈물은 흘려도 되지만 큰소리로 우는 것은 안 된다. 설령 누군가 규칙을 어겼어도 장본인에게 대놓고 말하는 대신 그저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헛기침 소리만 낼 뿐이고, 불평을 하는 대신 나중에 조용히 자기네끼리 투덜거릴 뿐이다.
"Pretending I am a nice person day after day is exhausting.( 매일같이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사느라 힘이 든다.)" 늘 규칙을 따르며 사느라 지치고 피곤하다. 여인들끼리는 일상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을 허용하는 듯하다. 가까운 친구들끼리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참을성으로 눌러놓은 것을 슬며시 풀어놓는 듯하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한바탕 수다를 떨며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같다.
우리도 그런 게 있고 우리도 그렇지 않나? 언제나 나이를 따지고 나이를 묻는 세상이 좁고 갑갑하다. 저마다 해야 할 도리가 어깨를 누르고 있어 무겁고 버겁다. '여자답게' 행동하느라 늘 조신해야 하고, '나이에 맞게' 행동하느라 힘들어 죽겠고, 어른도 못되었으면서 '어른답게' 사느라 기진맥진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이 나이에?"라며 주저앉는 내가 답답하고 못마땅해서, 문득문득 그런 나에게 대들고 싶어진다.
모임을 빙자해 미용실에 갔다. '예쁜' 머리 말고 '재미있는' 머리를 부탁했다. "나, 오늘은 이런 여자야."라는 선언과 함께, '뽀골뽀골 지지고 볶은' 모습을 찍어 딸에게 전송했다. 딸이 "재밌다." "멋지다."라며 응원을 보냈다. 친구들은 "파마를 했느냐?" "가발이냐?"고 물으며 살아가는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했다며 부러워하고, 내 머리를 '워너비 머리'와 '영원히 잊지 못할 머리'라고도 했다. 우연히 만난 이웃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시는군요."라고 하고, 일하느라 바쁜 친구는 "우리 사회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상야릇한 말도 했다. 훗훗훗.
잠시 딴 사람이 되어 갑갑한 세상을 빠져나왔다. 내 안에 잠자던 모험심과 용기를 호기롭게 꺼내 너그럽게 허용했다. 예쁘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만끽했고,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웃는 '여유'를 누렸다. 팽팽한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간 듯 하루가 말랑말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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