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출가(丈夫出家)'는 사내가 집을 떠나면, '생불환(生不還)'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1908~1932)은 민족 광복을 위한 사상가로 '독립운동이란 목숨을 버릴 각오 없이는 안 된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파평 윤씨 황(璜)의 아들로 백부 윤경이 초학을 지도했고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충남 예산 출신이다. 매헌은 25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천추에 빛날 영웅이다.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2세에 3·1운동의 영향으로 식민지노예교육을 배격하고 자퇴했다. 최병대(崔秉大)에게 한학을 배우고, 1921년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오경 외 고전을 섭렵했다. 1926년 농촌부흥을 위해 사랑채에 야학당을 세우고 계몽운동을 폈으며,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했다.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수암체육회를 설립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시재(詩才)가 뛰어난 매헌은 1930년 23세에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비장한 편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1931년 상하이에 도착, 안중근의 계씨 공근 집에서 동포 박진(朴震)의 직공으로 일하다, 1932년 홍구에서 야채상을 하며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와 만났다. 백범은 노소 경계가 없는 큰 동지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것'을 호소했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의 협의로 4월 29일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키로 했다. 김구는 4월 29일 김해산(金海山) 집으로 매헌을 초대하여 아침을 함께 했다. 농부가 일터에 나가기 위해 밥을 먹듯 했다고 '백범일지'는 전한다. 식후 시계를 꺼내 '이 시계는 애국단 가입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샀는데 선생님 시계는 낡은 2원 짜리니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 쓸 수가 없으니까요'라고 했다. 또 돈을 꺼내 주면서 '자동차 삯 5~6원이면 남습니다'고 했고, 차를 탄 뒤 목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고 했다고 한다.
홍구공원에 도착, 삼엄한 경계에 매헌은 일장기를 들고 보자기에 싼 도시락 폭탄과 어깨에 물통폭탄을 메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9시에 개막되어 11시경에 '일왕만세'를 부르는 찰라 물병폭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천지가 진동하자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면서 상해사령관 시라가와 대장, 상해거류민 단장 가와바다가 죽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대장이 실명했으며, 제9사단장 우애타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후 매헌은 현장에서 체포되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끌려갔다. 이 사건을 장개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해냈다며 경탄했다. 매헌은 5월 25일 상하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1월 오사카로 압송되고 12월 19일 11시 40분에 순국했다.
1946년 6월 16일 유해가 봉환되어 6월 30일 효창원에 국민장으로 봉안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고, 아들에 대한 유서를 남겼는데 '너도 조국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 태극기를 높이 드날리고, 내 무덤 앞에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했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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