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은 나라의 큰일을 맡는 자리입니다. 많은 이들의 존경도 받을 수 있는 나라의 어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장관을 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체면도 품위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마치고 퇴임식을 치룬지 하루 만에 귀향해 농부의 삶을 선택한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말이다.
그는 내각에 포진한 후배 공직자들의 구설수와 불명예 퇴진에 대해 씁쓸해했다. 올해만 해도 정책이 아닌 실망만 안기고 물러난 이들이 적지 않다.
최근 취중 택시기사 폭행 사건으로 수사를 받는 법무부 차관은 취임 반년 만에 사퇴했고, 국토교통부 장관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 논란으로 임기 109일 만에 '단명 장관'이라는 오명을 안고 퇴진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비판하는 지점은 가장 중요하지만 실상 지켜지지 않는 가치와 최소한의 소양에 대한 것이다.
그는 공직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쓴 글인 '상시분속(傷時憤俗)'에 비유했다. 시대를 아파하고 잘못된 풍속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선비가 아니고, 그런 시를 지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혼란한 정치 판국에도 국록(國祿)을 먹는 공직자라면 나라의 걱정거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농촌 생활 5년차에 접어든 이 전 장관을 경북 의성군 단촌면에서 만나 농업농촌이 당면한 문제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농촌 위기 해결에 여전히 한계
2일 만난 이 전 장관은 습벽을 느낄 수 없는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30여년의 연구 생활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을 거쳐 2013년 농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2016년 9월까지 역대 농식품부 장관 중 가장 오랜 기간을 보냈다.
하지만 귀향해 마주한 농촌의 실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평생 공부하고 일했는데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그저 이렇게 농사짓고 산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나'라는 자책감과 무게감이 그를 억눌렀다.
이런 책임감은 지난 2019년 경북도가 제안한 농촌살리기 정책자문관을 맡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주변에서 '장관까지 한 사람이 5급 기간제 공무원으로 가느냐' '채신머리 없다'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자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농촌을 손 놓고 보고 있기에 현실은 너무나 위태로웠다.
그는 지난 2년간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지역 곳곳에 나누고 최근 퇴임했다. 수백장의 보고서를 쓰고 전문가들과 함께 '농촌살리기 정책포럼'을 운영하며 평균 3시간 이상의 현장 토론회를 12차례 이끌기도 했다. 경북 23개 시군 곳곳을 50여 차례 방문하며 자신의 재능을 쓸 수 있는 곳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갔다.
이 전 장관은 "소문에 비해 별로 할 일도, 한 일도 없어 민망했다"며 "기회를 준 것은 감사하지만 모두가 닥친 일 처리에 바쁘다 보니 보다 근본적 문제에 대해 차분하게 논의하고 대책을 세울 여건이 부족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북 농촌이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경북은 우리나라 대표 농도(農道)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드넓은 농지 면적에 농가호수도 가장 많고, 밭 면적은 전국에서 가장 넓다.
그러나 경북 농촌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심각하다. 경북은 23개 시·군 가운데 3곳을 제외하고 모두 소멸위험지역에 속한다. 읍면단위 상황은 더 취약하다.
경북 농업의 경우 농업경영주 중 20~30세 젊은 경영주는 0.5%에 불과하고, 0.5ha미만 영세농가는 58.6%, 판매액 천만 원 미만 생계형 농가는 56.7%로 전국 평균에 비해 영세 고령화돼 있는 실정이다. 소멸위험은 방치된 빈집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전 장관 집 주변의 9집 중 5곳이 사람 손길이 사라진 빈집들이다.
그는 "지방소멸은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중요한 문제"라며 "경북은 영세고령농 비중이 많고 지나치게 생산에 의존하고 있어 농산업구조가 상당히 취약하다. 도농간 불균형 성장으로 농촌인구 유출은 갈수록 커지고 농가의 수급불안과 소득문제, 노동력 부족, 낙후된 생활환경 등 문제들이 심각하다. 농촌정책이 생산기반 구축에 초점이 맞춰져 주민 삶의 질 향상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중앙정부-지자체, 일하는 방식 혁신해야
사실 해마다 수십조 원의 예산과 인력, 조직이 투입되고 있으나 농업농촌은 침체를 벗어나기는커녕 붕괴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지역 특색이나 여건에 맞는 정책을 개발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중앙정부의 하드웨어 중심 획일·하향식 정책과 부서 간의 높은 칸막이가 개선되지 않고 있고, 재정 한계가 있는 지자체는 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보니 정작 주민 수요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
그는 "시도는 시도대로, 시군은 시군대로 중앙부처 공모사업을 따오는데 몰입하다 보니 지역여건에 맞지 않는 사업들이 남발하고 있다. 중앙정부 주도의 접근 방식에서 탈피해 지역 자원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는 상향식·통합적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자체의 일하는 방식도 새로워져야 한다고 적극 주문했다.
이 전 장관은 "지방분권을 통한 지역의 재량과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며 "지역에 부족한 정보와 사람, 재정지원을 확대해야 하고 지방이전기업과 농촌입지 업체에 대한 조세 및 금융지원 강화를 위한 소멸위험지역발전특별법(가칭) 제정과 규제특구제도의 적극 활용, 고향기부금제 도입, 농어촌상생기금 현실화 등 낙후지역의 산업발전과 생활환경 개선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정비가 선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은 "지방소멸이라는 절대 위기 앞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절박한 각오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경북 사과, 이제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경북 농촌을 활성화하기 위한 대안을 묻자 이제까지 사업을 제각기 추진하던 방식에서 탈피해 지역 산업의 효율을 높여 소득과 일자리를 만들고 생활환경과 공공서비스 공급체계를 종합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농산업을 특화하고 유통구조 개선, 6차 산업화를 통해 청년들이 올 수 있는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의 관광과 문화, 지역개발 등 관련 사업을 연계해 통합적으로 추진해보자는 것이다.
그는 농업의 6차 산업화를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6차 산업은 1차 산업인 농업 생산과 제조·가공·유통·관광 등 2·3차 산업을 융복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경북의 특화산업인 사과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애플밸리 융복합산업지구' 조성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전 장관은 "경북 사과 생산량은 전국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농가 주요 수입원이지만 인구감소와 고령화, 기후변화 등으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79번과 914번 국도변의 100여리 사과주산지를 따라 의성과 안동, 청송을 잇는 애플밸리를 육성해 인근 관광자원과 연계해야 한다"며 "박물관, 캠핑장, 와이너리 투어 등을 연계해야 고부가가치 문화관광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판 서당, 향부숙에서 풍요로운 농촌을 꿈꾸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역 미래를 짊어지고 갈 철학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 양성이라고 한다. 향부숙(鄕富塾)과 같은 '농촌을 살리는 공부방'인 현대판 서당을 운영하며 젊은이들과 함께 만들고 지켜나갈 품격있고 풍요로운 농촌을 꿈꾸고 있다.
후학 양성을 말하는 순간, 인터뷰 내 차분하고 진지했던 그의 표정에 그제야 웃음주름이 깊게 패였다. 편한 길을 마다하고 다시 농부로 돌아온 그에게 농촌이란 아직 풀어야 할 운명적 과업인 듯하다.
이 전 장관은 대구 대건고를 졸업하고, 영남대 축산경영학 학사·서울대 대학원 농업경제학 석사·미주리대 대학원 농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생활을 시작해 원장을 마치고, 농식품부 장관을 역임한 후 2016년 9월 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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