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이건희 미술관, 대구에 와야 제대로 빛난다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이태 전에 한류 공연 때문에 중남미 파나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보통은 인천공항에서 미국 LA를 거쳐 파나마로 들어간다는데 당시는 중동 지역의 정치적 상황이 심상찮아 미국 내 환승을 불허한다고 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을 거쳐 갔다.

스키폴공항에서 8시간가량 대기하게 돼 관광투어버스를 타고 눈 내리던 암스테르담 거리를 구경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앞 커피숍에서 펑펑 내리는 겨울눈을 바라보면서 감미로운 실내악과 함께 마시던 따뜻한 비엔나커피 한 잔의 맛은 이국적인 풍물과 더불어 긴 비행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환승 시간을 합쳐 꼬박 20여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고단한 항로 끝에 드디어 파나마공항에 도착했다. 캄캄한 한밤중이었고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러웠다. 마중 나온 승합차의 운전기사 겸 가이드는 60대 초반의 한국 남성이었고, 강한 경상도 북부 지역 억양을 쓰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내게는 익숙한 그 억양이 이국에서 사람을 안심시키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외곽 공항에서 파나마시티 도심까지 한참 걸렸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강한 빗줄기가 차창을 때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대도시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도시로 들어섰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고층 건물 위에 우뚝 선 삼성의 광고판이었다. 환한 불빛 속에 특유의 로고와 삼성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때 삼성의 위용과 힘을 다시 생각했다. 솔직히 평소 국내에서는 대기업의 일부 행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없지도 않았는데 그 순간만은 삼성이라는 기업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중남미의 한밤중에 찬연한 불빛으로 우뚝 선 삼성 광고판은 삼성의 조국인 대한민국과 그 국민인 나 자신과 일체가 되는 독특한 정서적 공감을 부여했다.

반도체와 IT 등 몇몇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삼성그룹이 대구 달성공원 앞 조그만 삼성상회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많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삼성을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우뚝 세운 고 이건희 회장 역시 대구시 인교동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대구라는 곳의 풍물과, 사람들의 기질과 문화적 정서가 기업 삼성의 성장, 이건희 회장의 출생과 성장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선친인 호암 선생이 사업 시작과 결혼 등 대구와 많은 관련을 가지면서 한국 정신문화의 맥을 잇던 영남의 선비정신과 사림의 중심지 대구의 정신문화를 내면화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삼성이 컬렉션했던 많은 귀중한 미술품과 유물들은 이런 정신적 맥락과 함께한다고 하면 아전인수식 억측이 될까? 돈이 많다고 다 예술품을 수집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서울을 제외하면 대구만큼 미술대학, 음악대학과 같은 예술대학과 뛰어난 예술인이 많은 지역도 없다. 대구는 한때 한국 근현대 서양미술의 메카였다. 피아노와 서양음악도 대구를 통해 처음 이 땅에 상륙했다고 할 정도로 비중이 컸던 도시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유물을 두고 각 지역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문화 분권, 지역 분권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비수도권 건립을 주장하고 있다. 타당한 주장이다. 문화뿐 아니라 정치, 경제 등 모든 게 수도권으로 초일극화되는 이 나라의 현실은 암울하고 미래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건희 미술관은 비수도권에 세워져야 하고 삼성과 정신적, 예술적 맥락을 함께하는 대구에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게 제대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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