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소아과 의사로 산다는 건

이동원 대구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이동원 대구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민정이 키 얼마예요? 몸무게는요? 잘 먹어요?"

민정이를 만나는 나의 첫인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네 살인 데도 몸무게와 키는 두 살 아이들 쯤이다. 엄마는 "과자랑 아이스크림만 먹고, 밥은 잘 먹지 않는다"고 푸념을 늘어 놓는다. "요즘은 어린이 집에 다니는데, 마음에 드는 남자아이가 있는지 걔만 졸졸 따라다닌다"면서 "집에서는 말도 안듣고, 엄청 고집이 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민정이는 아픔이 많은 아이다. 태어나는 첫 날부터 호흡이 잘 되지 않고 산소수치가 낮아서 인공호흡기를 사용했다. 얼굴 모양이 이상해서 염색체 검사를 했더니 다운 증후군이 있었고, 심장잡음이 있어 시행한 초음파 검사에서는 커다란 심장 구멍이, 배가 너무 부르고 장 마비가 있어 한 검사에서는 선천성 거대 결장이 진단됐다.

선천성 거대 결장 수술을 하고 집에 처음으로 간 것이 태어난지 60일째였을 것이다. 오른쪽 아래배에 커다란 수술 자국을 가지고서 말이다. 중간에 수시로 폐렴으로 입원해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치료를 했었다. 그 사이 심장의 큰 구멍을 막는 수술도 했다. 3살이 되면서부터는 건강해졌는지 폐렴이 걸려도 중환자실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진찰을 하려고 옷을 올리니 앞쪽 가슴에 수술 자국이, 배 쪽에 기다란 수술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술 자국들이 민정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얼마나 살고 싶어했는지를 보여주는 훈장 같았다.

3살이 되면서 꽤 의젓해진 민정이는 내 말을 유심히 듣는 것 같으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발달장애가 있어 재활치료며 언어치료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통 말은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이리저리 진료실을 뛰어다니는 민정이를 보며 4년 동안 힘든 시간들을 잘 견뎌준 민정이가 대견스러웠다. 한 때는 중환자실에 2주 이상 입원해 있으면서 '이제는 아이를 그만 힘들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마저도 떠올려야 했던 시간들. 지금 민정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의 시간들을 우리 모두 잘 견뎌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든 모습들을 볼 수 있어 난 행복하고 축복된 사람이다. 소아과 의사가 되었음에 너무 감사했다.

예전 전임의 시절, 은사님의 진료를 참관한 적이 있는데, 진료를 보러 왔던 26살 된 아가씨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어릴 적 심장병으로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판막 문제로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를 받던 환자였다.

진료를 마치고 나니 환자분이 청첩장을 교수님께 건넸다. 교수님은 "벌써 결혼이냐"며 기쁨과 놀라움,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이후 잠시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시더니 "결혼식 날 다른 일이 있어 못가게 돼 미안하다"며 축의금이 든 봉투를 그 아가씨 손에 쥐어 주셨다.

그 시간이 참 따뜻했다. '어릴 때부터 지켜본 아이가 나이가 들어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은 은사님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후 쯤 그 아가씨가 다시 외래 진료를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과 싸웠다는 말에 발끈 화를 내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마치 친정아버지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민정이가 진료실 밖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옛 은사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시간이 흘러 민정이가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생이 되고, 중·고등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는 그 모든 시간들을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아직은 예전의 은사님 같이 딸까진 아니고 친한 조카 정도로 느껴지지만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민정이가 딸처럼 느껴질 날이 올까?' 그때를 소망하며 오늘도 민정이의 눈빛을 마음 속에 담는다. 시간을 담는다.

이동원 대구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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