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피아노가 집에 없던 기간이 있었다. 걸어서 5분이면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집이 있었고, 학교 연습실에는 좋은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즐비했기에 굳이 방음도 잘 안되는 작은 집에 피아노까지 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소유의 피아노가 없는 생활은 처음이라 생소한 느낌이었지만 초반에는 딱히 불편하단 생각없이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언제든 칠 수 있는 내 피아노가 없으니 연습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고, 덕분에 자정에 학교가 문을 닫기 전까지 자투리 시간까지 이용해가며 연습실 맡기 경쟁을 하였다.
몇 달을 그렇게 버티던 중 학교 연습실 열쇠를 도맡아 관리하던 관리인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조금만 기다리면 기다린 순서대로 받을 수 있던 열쇠였는데, 새로 온 관리인은 약간의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 했고 차례가 흐트러졌다. 연습실 열쇠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학생들 중 동양인을 제외한 서양인 학생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순서를 무시하고 열쇠를 먼저 건넸고, 그 바람에 당시 잘 하지도 못하는 독일어로 엄청나게 싸워댔던 기억도 난다.
여하튼 그런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자 내 피아노 없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빌려 집에 들였다. 더 이상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연습실을 맡기 위해 길게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고, 온라인 예약을 위해 초 단위로 시간을 맞춰 핸드폰을 켜서 광클릭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습실 예약 스트레스와 열쇠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동안 낭비하는 시간이 없으니 연습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묘하게 게을러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없던 시기엔 귀찮음을 뚫고서라도 어떻게든 학교로 가서 연습을 하겠다며 버틸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젠 눈만 뜨면 바로 옆에 피아노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칠 수 있다는 생각에 슬슬 미루는 경우도 생겼다. 학교의 좋은 피아노랑 비교할 수조차 없는 품질의 피아노를 가지고도 적당히 '이 정도면 됐지뭐' 하며 타협해갔다. 결과적으로 '간절함'이 사라져갔던 것이다.
원한다고 해서 언제든 연습을 할 수 있던 것이 아닐 때는 설령 피아노 앞에서 집중을 못한다 하더라도 연습실을 사수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과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한 덕에 더 열심히 했던 것에 비하면 점점 나태해져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집에 들인 피아노는 렌트 기간을 더 연장하지 않고 반납을 하였다. 다시 학교 연습실에서 열쇠로 갑질을 해대는 관리인과 종종 싸워가며, 또 아침 일찍 인터넷 예약을 해야하는 생활로 돌아갔지만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부지런함과 간절함을 얻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간절함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고, 더 나아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것을 말이다.
유학 시절에 비해 모든 것이 편안하고 풍족한 지금, 가끔씩 그 때의 간절함과 나태함이 공존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더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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