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살구나무 집에 ‘살구 빛’ 미인 난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동편에 있는 살구나무에서 살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동편에 있는 살구나무에서 살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살구나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봄이나 고향이다.

연분홍색 살구꽃
연분홍색 살구꽃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어린 시절 자주 부르던 동요 「고향의 봄」 가사에는 아련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옛날 시골에는 서너 집 건너 한 집 꼴로 살구나무가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바람에 살구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넓은 길과 시멘트 블록 담이 생겼다. 예전에는 봄이 되면 아담한 초가 뒤란이나 울타리에 살구꽃이 활짝 피어 멀리서 마을을 바라보면 연분홍빛과 이제 막 새잎을 틔우는 버드나무 종류의 연두빛이 조화를 이뤄 정겨움을 더했다. 도시에서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시골 출신' 사람들은 아련한 고향의 봄 정경(情景)을 잊지 못한다. 청도 출신인 이호우의 시조는 살구꽃 핀 시골의 정감을 그대로 담았다. 비록 가난했지만 철철 넘쳤던 촌사람들의 인정을 실감나게 읊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 반겨 아니 맞으리'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꽃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소박한 살구꽃을 그리 후하게 평하지 않았다.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의 「화목9품」에는 살구꽃을 7품에 넣었다. 유박이 지은 『화암수록』의 「화목9등품제」에서는 6등품으로 매겼다. 장미과 집안에서 살구꽃의 사촌격인 매화가 '1등'인데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이지만 화목9등품제에 언급된 식물이 45가지뿐인 점을 감안하면 세상에 수많은 꽃과 나무 가운데 살구꽃의 가치가 6등품 혹은 7품에 매겨졌다면 그리 나쁘지도 않다. 유박은 또 「화목28우」에서 살구꽃을 염우(艶友) 즉 '아름다운 친구'로 분류했다.

신윤복 풍속화 「사시장춘」(四時長春), 18세기, 종이에 담채, 27.2×15.0㎝.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윤복 풍속화 「사시장춘」(四時長春), 18세기, 종이에 담채, 27.2×15.0㎝.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살구꽃 색깔은 복사꽃과 비슷한 연분홍이다. 옛날에는 연분홍색을 도색(桃色) 즉 남녀 사이 색정과 연관 짓는다. 연분홍빛이 도는 행화촌은 '살구꽃 핀 마을'이라는 뜻이라기보다 술집을 점잖게 부르는 말이다. 조선시대 신윤복의 그림 「사시장춘」은 행화촌을 잘 나타내주는 풍속화다. 한자로 '四時長春'(사시장춘)이라고 쓰인 주막의 주련 곁 정원에 살구꽃이 활짝 피었는데 방안에서 남녀의 춘정(春情)을 툇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분홍신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검은 신'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문 앞마당에서 술과 안주를 받쳐 든 어린 아이가 엉거주춤하게 서서 머뭇거리는 모습이 재미있다.

◆동선행림과 행림득의

중국 오(吳)나라에 동봉이라는 의술이 뛰어난 의사가 있었다. 그는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로부터 치료비를 받지 않고, 완치된 후에는 몇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병이 중한 사람은 다섯 그루씩, 병이 가벼운 사람들은 한 그루를 심게 하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수십만 그루가 넘게 심어져 주변은 온통 살구나무 숲을 이뤘다고 한다. 동봉은 살구 열매와 바꿔 얻은 곡식을 모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동선행림'(董仙杏林)이라 불렀고 훌륭한 명의(名醫)를 송축(頌祝)하는 의미에서 '행림'이라고 썼다. 훈훈한 봄바람과 생기발랄한 기운이 온천지에 가득한 것을 행림춘만(杏林春滿)이라고 했다.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얘기다.

행림득의(杏林得意)는 살구나무 숲에서 뜻을 이루었다는 말로써 과거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음력 2월에 당나라 수도 장안의 명승지 곡강(曲江)의 살구꽃이 핀 행원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축하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후에 살구꽃이 급제화(及第花)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행단, 은행나무냐 살구나무냐

행단(杏壇)은 일반적으로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행단의 나무를 살구나무로 여기기도 하고 은행나무로 해석하기도 해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장자(莊子)의 어부편에 나오는 '공자가 치유 숲을 유람할 때 행단 위에서 쉬며 앉아 있었다'(孔子遊乎緇惟之林 休坐乎杏壇之上)는 내용이 있다.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중국 산동 곡부의 공자묘 대전을 옮기면서 강당(講堂)의 옛터가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 그곳에 단을 쌓은 뒤 둘레에 살구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을 행단(杏壇)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금나라 한림학사 당회영(堂懷英)은 행단이라고 쓴 비석도 세웠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로 받아들여 공자 사당과 행단을 재현하면서 살구나무가 아닌 은행나무를 심었다. 공도보가 살구나무를 심은 지 수 백년이 흘러 살구나무는 그동안 사라지고 행단에는 오래 사는 수종인 회화나무와 은행나무만이 서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중국 행단에서 본 것은 살구나무가 아닌 은행나무와 회화나무였고 자연스럽게 행단의 행(杏)을 은행나무로 여긴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남아있는 서원이나 향교 명륜당 근처에 은행나무와 선비를 상징하는 회화나무가 서있는 까닭이다.

◆신비한 힘을 가진 나무

살구나무 목재는 특별한 쓰임새가 있었다. 스님들이 예불을 드릴 때 쓰는 목탁을 살구나무로 만든다. 특히 토종인 '개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은 소리가 맑고 청아하다고 한다. 또 굵은 살구나무를 몇 년간 물에 담가두었다가 빨래 다듬이 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기독교 『구약』성경의 「민수기」에는 모세의 형인 아론의 '살구나무 지팡이'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가 히브리 부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다가 12지파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열두 족장이 가진 지팡이에 이름을 써 증거의 장막에 바쳤더니 다음 날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까지 맺었다. 하느님이 아론을 12지파의 대표인 대사제장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경북 김천 직지사 황악루 앞에 있는 개살구나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북 김천 직지사 황악루 앞에 있는 개살구나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개살구는 천덕꾸러기?

개살구나무는 중국이 고향인 살구나무와는 달리 한반도에서 자라는 토종 나무다. '빛 좋은 개살구'(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다) '개살구 옆으로 터진다'(못 난 것일수록 못 난 짓만 한다)는 속담처럼 부정적인 표현에 자주 소환된다. 중부 이북지방이나 산지에서 주로 자라며 줄기에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해 살구나무와 구분된다. 열매는 작고 맛이 시고 떨떠름해 먹기 거북해 중국에서 들어온 살구에 밀려나고 이름마저 '살구'에서 '개'라는 접두어를 붙여 '개살구' 신세가 됐다. 요즘은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데 팔공산의 부인사 옛 금당 터 바로 앞 돌계단에 둘레가 어른의 한아름이 조금 넘는 개살구나무가 있다.

경북 문경시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는 청운각 담장 유리상자 안에 보존돼 있는
경북 문경시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는 청운각 담장 유리상자 안에 보존돼 있는 '충절의 살구나무' 그루터기.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 깊은 나무

경북에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살구나무 두 그루가 있다. 김천 직지사 황악루 앞에 있는 개살구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절에 와서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는 나무다. 박 대통령은 재임시절에는 직지사 복원사업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절 명부전에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또 하나는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청년 박정희'가 하숙했던 집 '청운각' 담장의 투명한 상자 안에는 '충절의 살구나무'라고 불리는 고사목이 보존되어 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지에 서거하자 이틀 뒤에 공교롭게도 이 살구나무에 꽃 두 송이가 핀 후 고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마치 '전설의 고향'처럼 전해진다.

살구도 과일이다. 먹거리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타작을 하면 부모들은 겉보리를 한 됫박 가지고 살구나무 있는 집에 가서 살구와 바꿔온다. 돈이 귀한 탓에 물물교환 한다. 많은 자식들 중에서 가족 몰래 먹는 녀석이 나올까 싶어 "살구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며 부모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농촌에 있던 많은 예전 살구나무는 거의 사라진 대신 지금은 신품종 살구나무가 과수원에서 재배된다. 과일도 유행을 타고 수익성이 떨어지면 수종을 갱신하기 때문에 시골에서도 오래된 살구나무를 찾기 힘들다. 도심의 공원에 조경수로 심어진 살구나무가 눈에 띈다. 대구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동편에 있는 살구나무는 문희갑 시장시절 옮겨 심은 것으로 6월에 노랗게 익어가는 살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두류공원 산책로의 살구나무도 마찬가지로 풍성하게 익어가면서 도시인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며 추억을 함께 해 준다.

살구
살구

'살구나무 자라는 집에 살구빛 미인이 난다'는 속담은 살구의 영양 성분이 풍부하여 피부에 좋다는 뜻이다. 사과산이나 구연산 같은 유기산과 비타민A, 베타카로틴 등이 풍부해서 피부노화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제철에 살구를 부지런히 먹어 피부미인으로 변신을 시도해 봄직하다. 살구가 잘 팔리면 과수농사가 힘들어 깊게 패인 농심의 주름도 함께 펴질 것이다.

이종민 편집부장 chunghama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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