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순국 독립운동가, 굵고 짧게 살며 이름 남기다

대구감옥 순국자들

옛대구감옥(대구형무소)
옛대구감옥(대구형무소)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은 일본 총칼 아래 신음하며 살아야만 했다. 한국 산하의 뭇 자연 자원과 인력 자산은 일본 제국주의에 동원되고 착취되었다. 반면, 일제는 세계 강대국 반열에 올라 제국주의 세력에 편승, 약소국을 괴롭히고 세계 평화와 민족 자주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5천만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2천만 한국인은 독립전쟁에 나섰고 광복은 마침내 이뤄졌다. 34년 11개월 16일(1910.8.29.~1945.8.15.)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내외 흩어진 한국인의 투쟁은 처절했고, 그 희생은 헤아릴 수 없었다. 다양한 투쟁 방법이 동원됐다.

어떤 보호의 울타리도 없는, 희생에 대한 어떤 보답이나 댓가도 기대할 수 없는, 뒷날 어느 누가 기억해줄지도 모르는 망국 백성의 독립운동은 그야말로 희생 그 자체였고, '무모한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길을 마다 하지 않은 애국선열의 이야기를 여러 독립운동사 관련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전쟁에 나선 선열의 남다른 투쟁과 활동의 흔적을 살펴본다.

조선 각 형무소 배치도
조선 각 형무소 배치도

◆대구감옥 순국자들

옛 조선왕조 시절의 5복(福)은 장수와 부귀 즉 수부(壽富)의 복과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과 고종명(考終命)이었다. 특히 장수(長壽)가 으뜸이었다. 오죽했으면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라에서 벼슬까지 주었겠는가. 비록 권한은 없는 명예직이지만 바로 수직(壽職)이라 불리는 노인직(老人職)이었다. 80세를 넘은 노인에게 주어진 감투였다.

또 오래 살다보면 운에 따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최고 벼슬에까지도 높아질 기회도 잡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세종시절 황희(黃喜)는 1431년 69세에 바로 그런 자리인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후 그는 18년(1431. 9. 3~1449. 10. 5) 동안 영의정을 지냈고, 90세까지 장수(1363~1452)했으니 드물게 수복(壽福)까지 누렸다.

벼슬뿐만이 아니었다. 장수 노인에게는 넉넉히 먹을 양식도 줬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기록에는 "100살이 된 노인에게는 해마다 쌀 10석으로 상을 내리라. 매월 술과 고기를 보내 주고 월말마다 그 수효를 기록하여 보고하라"는 내용도 있다. 대략 1석(石)은 144kg이니, 요즘 성인 1인의 1년 쌀 소비량(60kg쯤)을 따지면 쌀 10석은 엄청나다.

◆ 대구경북 유학자 평균 수명 64.7세

장수가 축복이던 시절, 대략 수명은 어땠을까. 대구경북을 살펴보자. 지난 2008년 한국국학진흥원의 『경북유학인물지』(상·하)가 1910년 이전 태어나 10~20세기 대구경북의 유학자로 살았던 1만8천900명 가운데 생몰(生沒)이 확인된 9천930명의 평균 수명은 조사했더니 평균 64.7세였다. 전체 민중 가운데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유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였던 만큼 이들은 대체로 장수의 삶을 살았다. 나름의 축복을 누렸던 셈이다.

이들의 평균 수명과 일제강점기 유학이나 신지식의 소양 그리고 남다른 가치관과 배움 등을 바탕으로 독립전쟁에 몸을 바친 애국지사의 짧은 생애를 보면 무척 비교가 된다. 필자는 1894~1945년까지 일제에 맞서다 대구감옥(형무소)에서 사형, 고문 후유증, 옥중 질병 등으로 옥사했거나 출옥 뒤 순국한 206명(독립운동서훈자 202명) 가운데 생몰이 확인된 200명의 생애를 분석한 적이 있다. 그 결과 평균 수명은 겨우 34.3세에 그쳤다.

대구형무소 배치도(출처 대구형무소 배치도,1939년)

◆ 대구감옥 순국자 평균 수명 34.3세

특히 이들 대구감옥 순국자는 10대~70대까지 분포하고 있지만 가장 많은 연령대는 20~30대로 전체의 75%나 차지했다. 이는 일제가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한국인, 특히 젊은이에게 가혹한 형벌과 고문 등으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이런 독립운동가의 짧은 애국의 순국은 뒷날에 이름을 남긴 '유방백세'(遺芳百世)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 27대 임금의 평균 수명 46세 보다 단명이지만 남긴 자취는 더 짙다.

대구공소원(출처-조선구시의형정)
대구형무소 배치도(출처 대구형무소 배치도,1939년)

물론 이들 대구감옥 순국자 모두 대구경북 출신이 아닌 탓에 대구경북 유림의 평균 삶과 단순 비교는 곤란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전라남북도(호남)과 경상남북도(영남), 충청, 제주, 강원도 일부지역까지 관할한 공소원(복심법원)이 위치해 이들 지역 숱한 애국지사가 대구감옥에서 사형집행 등으로 순국한 때문이다. 그래도 대구경북 출신(주소)이 가장 많은 분포여서 대구경북 지사의 대구감옥 순국자의 짧은 삶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206명의 대구감옥 순국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은 희생자는 1943년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이준윤(李浚允)이었다. 그는 1925년에 태어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에 생을 마쳐 불과 19세의 삶을 살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순국자는 1919년 4월 파리장서운동에 연루된 곽종석(郭鍾錫)이었다. 그는 파리장서운동서명자로 대구감옥에 수감됐다가 1919년 7월 21일 폐결핵으로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곧바로 10월 17일 74세로 삶을 마쳤다.

이들 순국 지사들이 누린 평균 34세라는 단명의 삶은, 한 나라 국운의 융성과 쇠멸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이는 뒷날 광복과 함께 조국의 재건 과정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한 생존 독립운동 애국지사의 활동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다. 특히 부일(附日) 또는 친일(親日) 인물이 횡행하며 부귀와 영광을 마음껏 누렸던 뒤틀린 현실을 떠올리면 아까운 능력과 가슴 속 포부를 펴지도 못하고 단명한 순국 지사들의 삶에 가슴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대구공소원(출처-조선구시의형정)

한편 대구감옥에서 사형집행 등으로 삶은 마친 206명(독립운동서훈자 202명)의 순국자의 평균 수명은 대구지역의 독립운동서훈자 175명과 비교해도 단명이었음이 드러난다. 필자가 지난해 8월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수록된 2천여 명의 대구경북지역 출신 독립운동 서훈자 명단에서 대구 인물로 파악된 175명 가운데 생몰이 확인된 155명(미상 20명)의 평균 수명을 분석한 결과 62.3세로 나타났다. 이들은 고문과 옥고 등 속에서도 건강 회복과 광복 등으로 새 삶을 누린 셈이다. 사형과 고문 등으로 너무나 짧은 생애를 마치고 순국한 애국지사에 비해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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