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분이(3) - 김옥순(김아가다)

세상살이 고달픔 '산 넘어 산'…까막눈 한스러워 기 쓰고 자식 교육

2000년 허분이 여사의 한강 산책길
2000년 허분이 여사의 한강 산책길

그 후 소식은 젊은 년이 폐병에 걸려서 죽었다더라. 옥이는 내 자식으로 호적에 올리고 키워서 시집보냈다. 키운 정도 정이더라. 낳지 않았지만 내 손으로 키운 딸이니 똑같은 자식이다. 옥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옥이 팔자도 기가 막힌다. 초가을이었는데 웬 총각을 하나 데리고 왔다. 배는 불룩하고 옷도 없는지 여름 반소매를 입고 벌벌 떨면서 둘이 왔더라. 동네 사람 알까봐 얼른 끌고 들어와서 옷을 입히고 집에 재웠다. 한 달간 데리고 있다가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옥이는 그 이후로 친정에 발길을 끊었제. 지지리도 없는 남자를 만나서 고생을 푸지게 한다고 소문에 들리더라. 아가, 남자들은 마음에 정분이 나서 색을 탐하기보다 본능이 앞서서 저지른다고 한다. 너도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럴 때는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그 아비 핏줄이니 어련하겠냐. 내 한평생 그런 염려하면서 살았다.

삼대독자 집안에 아들을 여섯이나 낳아주었는데 나한테 소홀히 해서야 되겠냐. 외아들로 자란 영감은 자신밖에 몰랐다. 맛난 음식, 좋은 옷, 대접받는 것 좋아했다. 돈 잘 쓰고 술 잘 사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용두방천에 보를 막는 일에도 한밑천 갖다 넣었다. 사람들이 추켜세우면서 잘한다고 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징, 북, 장구, 꽹과리. 사물놀이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량이었다. 기생집에는 오죽 들락거렸을까. 알고도 모르는 채 들어도 귀머거리로 살아야 했다. 그뿐 아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겠노. 글을 쓸 수 있다면 책 한 권은 넘을 게다.

집안 큰살림에 자식은 많지 들어갈 돈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세상일에 촉이 빨랐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하던 중에 집안 아저씨가 돈 넣고 돈 먹는 빠찡꼬를 소개했다. 뭣인지 잘 모르면서도 돈이 된다는 소리에 구미가 당겼다. 돈 벌어서 땅 사고, 밭 샀더니 부동산이 자꾸 불어나더라. 친정 아베가 가지고 떠난 전답 문서가 생각이 나서 그랬다. 요샛말로 하면 트라우마라고 하제. 비옥한 수성 뜰이 전부 내 것이 되더구나. 돈은 내가 벌었는데 일일이 영감한테 말하고 타 써야 하려니, 나 원 참 더러워서. 금고에 돈을 꽉 채워놓고 혼자만 야금야금 썼단다.

2005년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이천 온천에서 찍은 사진
2005년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이천 온천에서 찍은 사진

신명 많고 흥이 많은 영감은 인기가 있었다. 인물 좋고 기운 좋아 전국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두 번이나 탔단다. 왜정 때 일본 순사를 개 패듯이 패준 적도 있다. 쥐뿔, 애국자인 척 주먹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못마땅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살 부딪히고 사는 영감인데 어쩌랴. 고추를 못 달고 태어나 버림받은 한이, 나를 억세고 강하게 살게 했는지 모른다. 분함에서 너그러움도 같이 습득한 모양이다.

내가 평생 살면서 영감한테 딱 한 번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홀시어머니에 외동아들은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다. 내가 아무리 잘해 드리려고 노력해도 흉잡고 삐치는 시어매를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청상에 혼자되어서 아들 하나 믿고 살았으니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동네에서도 게살궂은 어른이라고 소문이 났더라. 이웃집 제삿날은 어찌나 여물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더라. 음복하러 오라는 기별이 없으면 뒷짐 지고 제사 지낸 집 앞에 얼쩡거리면서 잔소리를 했다. 진중하지 못한 어른 때문에 남세스러운 것 말도 마라.

동이 트면 들에 나가 해거름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부엌이 싸늘했다. 불이나 때놓고 가마솥에 물이나 한 솥 끓여놓으면 좀 좋을까. 아랫목에 드러누워 내다보지도 않았다. 허둥대며 저녁을 준비하는데 밥상 올리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리더라. 피우던 장죽을 재떨이에 탁탁 치는 소리가 나면 성질났다는 신호다. 속에 천불이 나지만 어른이라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랬더니 어른 말씀 하시는데 대답하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악을 지르더라.

마침 영감이 집에 들어오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앞뒤 경우도 살피지 않고 부엌으로 쫓아와서, 들고 있던 삽을 나한테 던졌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있었는데 피할 겨를이 없었다. 말도 마라, 머리를 맞았는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라. 오기가 발동했지. 이놈의 집구석 제대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피가 얼굴로 타고 흘러내려도 꼼짝 않고 노려보았다. 영감이 오히려 놀래서 피를 닦아주고 난리가 났다. 그 시절에는 병원은 생각도 못 할 때였지. 된장 한 덩어리를 퍼 와서 머리에 싸매주더라. 자식들은 울고불고 집안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그때 영감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짓은 잘했던 것 같다. 분이 좀 풀리더라. 여자라고 숨도 못 쉬고 살아서는 안 된다. 옳은 일은 끝까지 옳다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뙤창으로 바깥을 살피던 시어매는 놀랐는지 다음부터는 별나게 닦달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노망들어서 벽에 똥칠까지 했다. 똥 수발 삼 년을 시키더니 북망산천으로 떠나셨다. 나는 며느리한테 시집살이 시키지 않겠다고 그때 맹세했었다. 자식들이 그때 놀래서 아직 제 마누라 두들겨 팬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너그러운 시어미가 되려고 나도 숱하게 노력했지만, 며느리들은 섭섭한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너도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다오.

1975년 허분이 여사 회갑잔치
1975년 허분이 여사 회갑잔치

아가, 아들 많이 낳은 내가 보속할 일이 많다. 하나같이 제 아비 닮아 성질 급하고 힘이 불쑥거리니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들놈들 전부 정관수술 시킨 것도 이유가 있었니라. 아랫도리 힘까지 불쑥거려 바깥에서 씨앗 받아올까 봐 애면글면 살았니라. 그래도 내가 누구냐. 천하의 '허분이'다. 하나도 삐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제 몫을 하면서 살도록 키웠지 않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더니, 이놈을 다스리면 저놈이 껄떡거리고, 말도 마라. 첫째와 둘째는 점잖고 심성이 곱다. 셋째부터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제. 돈푼깨나 있고, 사는 것이 번듯하니 자식들이 세상 있는 폼은 다 잡고 다녔다. 잘생긴 내 아들들 대구 시내를 주름잡았니라.

부모가 돈 벌었는데 쓰는 놈은 따로 있더라. 힘자랑하는 저거 아버지를 닮아 건들거리고 다녔다. 주머니에 손 빠르게 넣어 돈 쓰는 시늉은 어찌 그리 빼다 닮았는지 하나같이. 다른 사람이 돈 내는 꼴은 못 본다. 돈 먼저 내는 놈이 잘난 놈이라고 생각하는지, 나 원 참. 그 꼴 보는 내 심정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더라. 손톱 밑이 여물도록 살았는데 내 고생을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

재산을 억척같이 끌어모은 것은 이유가 있다. 천석꾼 만석꾼이 되어서 아베한테 복수하고 싶었지. 아들만이 집안의 대를 이어가고 가문을 빛낸다는 것은 오산이다. 아베의 아들인 '허씨' 성을 가진 동생들이 내 돈을 빌려갔지만, 꿀꺽 삼킨 것도 제법 있다. 나는 치마를 둘러 여자이지 남자가 하는 일은 모두 해내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여장부라고 하더라. 신랑도 데데하게 놀면 한마디로 매조졌다.

"달고 있으면 뭐 하노, 남자 행실을 제대로 하시오!"

하고 호령을 했다.

산을 하나 넘으면 강이 나오고 그 강 건너면 또 더 큰 산을 넘어야 하고, 한고비 두 고비 겪어낸 세상살이 고달팠다. 나도 어지간 하제. 왜정시대를 살아냈고, 광복과 6.25동란을 거치며 시대의 격랑을 다 헤쳐 나왔다. 까막눈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옆 가지에서 싹이 턴 자식까지 모두 고등교육을 시켰다.

옛날에 우리 집이 대봉동 미군 부대 곁에 있었다. 영어를 배운 첫째와 둘째가 미군 부대에 취직해서 우리 집에는 미제물건이 풍족했다. 그것도 은근히 자랑스럽더라. 아마 좀 우쭐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햄, 커피, 맥주. 꼬부랑글자가 적힌 상품을 대청마루에 있는 자개 찬장에 넣어놓고 좋아했지. 냉장고가 많이 없던 시절에 도시바 냉장고가 우리 집에 있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했지. 못 배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 자랑밖에 할 수 없더구나.

자식 여덟 키우는 동안 내 속을 제일 많이 긁은 자식이 일곱째 네 신랑이다. 내 복사뼈가 왜 이리 딱딱하고 굳은살 박인 줄 말해줄까. 그놈은 나가면 사고를 쳤다. 누구를 두들겨 패든지, 야간통행 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있든지. 하이고 몸서리난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 또 우리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 꿇고 성모님께 기도했다.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우리 아들 지켜달라면서 등짝에 땀이 물처럼 흘러내릴 때까지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분이' 4편은 다음주 목요일(29일)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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