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죽어서도 산 일본인 떨게 하다

지도자 죽음 은폐한 일제

2008년 권오설의 묘 이장 때 함석으로 밀봉한 철관이 드러났다.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2008년 권오설의 묘 이장 때 함석으로 밀봉한 철관이 드러났다.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일제가 권오설의 시신이 든 관을 함석으로 밀봉한 철관과 아들 권오설에 대한 피맺힌 사연을 적은 아버지의 제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일제가 권오설의 시신이 든 관을 함석으로 밀봉한 철관과 아들 권오설에 대한 피맺힌 사연을 적은 아버지의 제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맞았다.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유언했다. 1545년 태어났으니 54세 삶을 왜적의 흉탄에 마쳤고, 장군의 죽음은 싸움이 끝나고 전파됐다. 병사들의 동요와 사기 저하를 걱정한 탓에 전투 중 장군의 죽음을 알릴 수 없었다. 뒤늦은 장군의 부음에 사람들은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애통해했다.

중국 『삼국지』에는 유비에 이어 아들 유선을 도와 천하통일에 나선 촉(蜀)나라 제갈공명(181~234)이 전투를 앞두고 죽음을 맞는 장면이 나온다. 54세로 죽었지만 그는 적군인 사마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를 일러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달아나게 했다'는 말이 생겼다. 제갈공명이 생전처럼 지휘하는 연출에 적이 속은 셈이다.

위 두 사람처럼 각 진영에서는 지휘자의 죽음을 비밀에 붙였다. 전투 중 지휘자의 죽음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전투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서다. 지휘자의 죽음이 이처럼 산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도 이런 맥락의 사례들이 많다.

일제는 독립운동 지도자의 죽음을 은폐하고 장례도 탄압했고, 고문 등으로 순국한 애국지사의 죽음이 몰고 올 파장을 극도로 경계했다. 공개 장례도 막았다. 이들의 장례가 민중을 자극, 소요로 번질 수 있는데다 무덤도 저항의 성지가 될 것이라는 공포에 일제는 죽은 독립운동가조차 괴롭혔다.

허위 의병장
허위 의병장

◆허위 의병장 시신 골짜기 버려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왕산 허위가 그렇다. 경북 구미(선산) 출신의 허위는 의병을 이끌고 서울 진격과 국권회복의 꿈을 이루기 전에 1908년 6월 11일 일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어 9월 18일 사형선고와 10월 21일 서대문감옥 사형집행 1호로 54세에 순국했다. 1855년 태어나 망국(1910년) 직전 삶을 마쳤다.

일제는 시신을 골짜기에 버렸고, 제자 박상진이 겨우 스승의 시신을 수습, 헛집에 모셨다가 다시 고향 선영 아래 안치했다고 한다. 사자(死者)의 예우를 중시한 당시 유학의 장례 문화를 감안할 때 일제가 일부러 시신을 버려 장례를 방해하고 떳떳한 예우조차 못하게 한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중국(하얼빈역)에서 1909년 10월 26일 일제 초대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장례도 그랬다. 일제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 뒤 3월 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가족 요청에도 시신을 인도하지 않고 유지에 따른 하얼빈 공동묘지 안치도 막았다. 대신 수인묘지에 서둘러 묻었다. 그의 묘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까 겁을 낸 일제의 만행으로 아직도 묘지를 찾지 못했고, 그의 영혼은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8년 그의 유해 발굴이 시도됐지만 실패였다. 사형 집행 전날 그가 "나의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며 동포에게 전한 염원은 이뤄졌다. 하지만 그가 최후로 남긴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란 유언은 111년 동안이나 지킬 수 없게 됐다.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관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관

◆박상진 광복회 총사령 장례 핍박

1921년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사형된 박상진 독립운동가의 장례도 같다.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 총사령이던 그는 우재룡 지휘장 등 동지들과 군자금 마련과 독립군 양성을 위해 김좌진 만주지부장 등으로 조직망을 갖춰 활동하다 1918년 10월 붙잡혀 38세에 형장의 이슬이 됐다. 올해 순국 100주년을 맞았으니 그의 장례마저 핍박한 패륜의 일제 만행을 되새기면서 그를 기릴 만하다.

일제의 탄압은 부친(박시규)이 그의 제삿날(1923년)에 쓴 2천700여 자(字)의 긴 제문이 그대로 증언한다. 제문에서 부친은 "발인할 때부터 기마대가 달려와 길가에 늘어서 오는 손님을 휘몰아 쫓았는데, 그 광경이 참혹했고, 산상(山上)까지 와서 회장(會葬)한 사람은 겨우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며 일제 탄압을 통탄했다.

증손(박중훈)도 2020년 쓴 책(『박상진의 삶에서 찾은 열쇠말 9개』)에서 증조(박상진)의 장삿날 처참했던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장례식까지 미친 일제의 탄압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발인이 새벽 3시였으니 이 또한 저들의 저의가 있었을 것"이라며 일제의 만행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순국 애국지사의 장례를 탄압한 일제의 반인륜의 악행의 사례는 숱하다. 3·1만세운동 참가 민족대표 33인이었던 한용운 스님이 독립운동가 김동삼(1878~1937)의 시신을 몰래 처리한 일화도 같은 사례이다. 특히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8월 31일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시절 자신의 SNS에 올려 세인들 관심을 끌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권오설
'만주의 호랑이' 별명의 김동삼

'만주의 호랑이'로 불리던 경북 안동 출신 김동삼은 1931년 붙잡혀 징역 10년형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1937년 4월 13일 순국했다. 일제가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자 한용운 스님이 나서 5일장의 장례식을 치뤘지만 조지훈 등 20여 명만 겨우 조문했다고 한다. 일제 보복과 후환이 무서웠던 탓이었으니 당시 일제의 애국지사 감시와 탄압을 상상할 만하다.

독립운동가 권오설

◆권오설 선생 시신 함석으로 밀봉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동한 경북 안동 출신 권오설의 장례는 더 처참했다. 일제는 1930년 그가 33세로 죽자 고문 흔적을 감추려는듯 시신이 든 목관(木棺)을 함석으로 밀봉했다. 무덤에 봉분조차도 짓지 말고 평장하고, 외부 조문은 절대 받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2008년 묘 이장 때 철관 속에 함몰된 두개골이 발견돼 일제의 고문 만행을 증언했다. 1932년 3월 19일 아버지(권술조)가 손수 붓을 들고 쓴, 길이 4m에 이르는 절절한 부자(父子) 사연의 제문은 가슴을 무너지게 한다.

"임신년 3월…아비는 눈물을 머금은 채 붓을 잡고 평생의 회포를 서술하여 영원히 하직하는 말을 고하여 이르노라.…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하니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고문으로 꺾이고 분질러짐을 당하던 날에도 죽지 않았고…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을 당하였으니…내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부자간의 영결(永訣)의 말이로다. 너는 혹 이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을 알려는가? 원통하고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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